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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여행 “태종대 가볼까?” 장인의 말씀이 반가웠다. 명절에 부산 처가에 갈 때마다 부모님과 가벼운 나들이를 했다. 금정산성, 통도사, 간절곶, 산복도로, 해운대···. 그러나 십수 년이 훌쩍 넘어버리니 이제 갈 곳이 마땅찮아졌다. 올해는 어딜 가나 아내랑 이야기해 봤지만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이번엔 금정산성, 다음번엔 통도사, 도돌이표를 찍자 하고 내려갔다. 그런데 장인께서 먼저 행선지를 이야기하시니, 고마울 뿐이다. 태종대! 많이 들어봤지만 난 처음이었다. 장인어른, 장모님은 이십 년 만에 왔다, 아니다, 삼십 년 만이다, 이런 말씀을 나누신다. 서울 사람이 남산에 잘 안 가는 것과 비슷한가보다. 추석 연휴라 놀러나온 사람들이 많지만, 다행히 산책로는 붐비지 않았다. 편안한 속도로 걸으면서 동.. 2021. 3. 19.
수명의 논리 건축주는 늘 어려운 질문을 한다. 이번에도 심각하게 질문했다. “이 건물이 얼마나 갈까요? 그러니까 건물의 수명 말이에요.” 누군가 나에게 ‘넌 몇 살까지 살 수 있을 것 같니’라고 물어보는 것처럼 아찔해진다. 누군들 자신의 수명을 알까? 건물도 마찬가지인 것을. 어떤 건축재료 회사들은 ‘50년 보장’ ‘반영구적’이라며 제품의 우수성을 홍보하는데, 실제 사용된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반영구적인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면 건명재인, 즉 건축의 수명은 인간에 달렸다는 것. ​사무실을 옮겼다. 이번엔 1920년대 후반에 지어진 일본식 목조주택이다. 과거에도 개발회사가 있어서 일본인 주택업자가 큰 토지를 매입해서 택지 조성을 한 후 다량의 주택을 .. 2021. 3. 19.
스토리가 있는 장소 서울 기온이 36도라고 일기예보에 나오길래 안 되겠다 싶어 하루짜리 피서를 떠났다. 설악산 너머 동해바다나 보고 오자며 아침 일찍 나섰다. 확실히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강릉을 향해 달리다가 속초로 방향을 바꾼 것은 서점 때문이었다. 탐독가는 아니지만 ‘서점’이라는 공간을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서점에 가면 기분이 좋았는데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나만은 아닌지, 요즘 쇼핑몰이나 호텔 등에 서점 형식의 인테리어가 적용된 곳이 많다. 그래서, 도착해서 아침을 먹자마자 달려간 곳이 동아서점이었다. 속초에서 3대째 운영하고 있다길래 오래된 가게인 줄 알았는데 깔끔하게 리모델링되어 있었다. 일단 첫인상은 쾌적하다는 것. 층고가 높아 공간이 탁 트인 느낌이 들었고 구획별로 잘 비치된 책들이 무척 다.. 2021. 3. 19.
더위를 대하는 건축가의 자세 겨울에 시작된 집은 설계하는 내내 ‘단열’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건축주와 대화도 난방비, 단열, 추위 등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햇빛을 최대한 많이 받도록 해야 하니까, 남쪽창이 점점 크고 높아진다. 공사를 하다 보면 여러 계절이 지난다. 공사가 끝나 갈 무렵이 여름이라면 큰 창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햇볕에 깜짝 놀랄 수도 있다. 너무 크게 만들었나 정신이 아찔해진다. 밝아서 좋긴 하지만 처마를 좀 더 내밀 걸 그랬나, 창 하나를 없앨 걸 그랬나, 후회가 밀려온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어서 빨리 겨울이 다시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올여름처럼 설명할 길 없는 무더위 앞에서는 ‘열’ ‘더위’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작년에 입주한 건축주를 만나러 갔다가 나눈 대화도 .. 2021. 3. 17.
고양이, 강아지 그리고 건축 오랜만에 인천에 리모델링한 집주인 부부를 보러 갔다. 테라스에 못보던 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린다. 가끔 오는 길냥이에게 밥을 줬더니 이제 제 집인 양 드나든다고 한다. 그 고양이는 얼마 전 새끼를 낳았고(네 마리!) 이젠 동네 친구 두 마리가 더 놀러 와서 모두 일곱 마리가 됐다. 몸 풀기 좋은 곳이라고 소문이라도 났는지 그 중 한 마리는 배가 불룩하다. 내칠 수 없어 사료를 사다 먹이는 정 많은 집주인이지만 그들 부부도 어떡하나 하는 표정이다. 이 집엔 어른 손바닥보다 조금 큰 강아지가 살고 있다. 그래서 설계할 때 윗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강아지용 계단을 따로 만들었다. 워낙 조그맣고 겁이 많은 강아지는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만든 계단조차도 힘겨워했다. 대신 부부가 정성스럽게 만든 꽃길이 있는 마당에서.. 2021. 3. 17.
도시의 품격 민원이 들어왔다. 민원인 앞에서 어깨가 낮아지는 게 건축가이긴 하지만 이번엔 자세가 꼿꼿해졌다. 두 장짜리 보고서로 정리된 민원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상식의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민원 보고서는 이런 내용이었다. ‘지금 공사 중인 건물이 벽돌건물인데, 벽돌 마감공법은 과거 1980년대 공법으로 품질이 떨어지고 도시 미관을 저해하여 차후 임대 및 분양에 많은 지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 인해 주변 건물의 집값이 동반 하락될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도로 쪽에는 석재로 마감하고 안 보이는 면에는 저렴한 스톤코트로 했으면 좋겠다.’ 몇 가지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소유주의 건물 디자인에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 당당하게 변경을 요구하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그가 바꾸라고 하는 디자인-앞.. 2021. 3. 17.
장인의 발견 트래킹화를 살까 등산화를 그냥 신고 갈까? 아니면 운동화를 계속 사용할까? 제주여행 출발 전, 고민은 신발이었다. 이번 여행 컨셉이 걷기라 걷기 편한 신발을 신고 싶었다. 이전부터 갖고 있던 등산화나 운동화도 나쁘지 않았지만 사람 마음이 요상한건지 마치 걷기전용 신발을 신으면 더 잘 재미있게 걸을 것 같았다. 며칠 고민 끝에 나는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 뭐라도 조금 더 낫겠지라는 얄팍한 명분에 어느새 카드를 긁고 있었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신발 밑창부터 안쪽까지 샅샅이 꼼꼼히 살폈다. 음, 역시 잘 만들어졌네. 잘 걸을 수 있겠어라는 자기 확신을 가질 정도의 만듦새는 되었다. 등산화보다는 가볍고 운동화보다는 튼튼해 보였다. 역시 나는 긍정의 달인인가 보다. 이 긍정의 연장선에서 아.. 2021. 3. 17.
서울역의 가능한 미래 무슈 프랑스는 2주 전만 해도 파리에 있었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그는 TV를 보다가 갑자기 떠나기로 결심했다. “내일은 회사 안 가! 쳇바퀴 돌 듯 반복되던 일상에 지쳤어. 그냥 여기서 가장 먼 곳으로 갈테야. 대륙의 끝으로!” 지도를 보니 대륙 끝으로 가는 길에 여러 도시들이 있었다. 시베리아를 지나갈까, 몽골로 갈까, 중앙아시아로 갈까? 무슈 프랑스의 마음에 쏙 도는 도시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새롭고 활기차고 훌륭한 풍경을 가진 도시가 없을까? “블라디보스토크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으흠, 서울, 서울?!” 유튜브의 케이팝 뮤직비디오에 서울을 본 기억이 난다. 밝고 활기찬 곳 같았다. 그래 거기로 가자. 그는 다음날 회사로 가는 길과 반대편으로 가서 파리 북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서울행 기차표를 샀.. 2021. 3. 17.
까치 건축가에게 까치가 감나무에 집을 짓는다. 오래된 주택을 리모델링하면서 감나무 두 그루를 남겼는데 그중 한 곳에 집을 짓겠다고 난리다. 나와 건축주, 현장소장 셋은 까치가 뭘하는지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작은 나뭇가지를 부리로 물어서 감나무 중간쯤에 앉는다. 나뭇가지를 이리 놓고 저리 놓아본다. 나뭇가지가 흔들리지 않고 안정되게 놓이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다 한군데를 정한 모양이다. 나뭇가지를 쌓아가는 그곳이 하필이면 주차장 바로 위다. 아이고, 거기는 안되는데. 그러나 까치는 마음을 정했는지 새똥으로 확실한 영역 표시를 한다. 인간들은 고민에 빠진다. 저기에 차를 세우면 분명 지붕이 온통 새똥으로 뒤덮일 게 뻔하다. 이 나무가 아니라 뒤에 있는 저 나무, 잔디 위로 가지를 뻗친 저 나무라면 전혀 문제.. 2021. 3.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