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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 다시 보기 ‘기생충’은 건축과 서사가 절묘하게 엮인 영화다. 삶의 현격한 격차를 보여 주는 고급주택과 반지하 공간은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피부에 닿는 듯 생생하고 날카롭다. 영화에서처럼 모든 반지하가 ‘빈곤’을 상징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지하=저렴한 주거’라는 인식은 만연되어 있다. 보통 오래된 주택이나 연립에 있다 보니 노후되었고 설비나 환경이 열악하다. 저렴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만만한 주거이기도 하다. 한편, 홍대나 신사동에서는 반지하 주거가 상업용으로 전환되면서 활발한 변화가 일어나 멋지고 이색적인 상업공간으로 전환되는 중이다. 반은 지상, 반은 지하인 공간, 즉 지층에 창문이 걸린 희한한 층이 어쩌다 생겨났을까? 지하 층 주거는 1970년, ‘방공호’의 개념으로 단독과 연립주택에 지하층을 의무.. 2021. 3. 19.
학교는 변하고 있다 어릴 때 살던 우리집 옆에는 여자중학교와 여자고등학교가 있었다. 유난히 수줍음과 부끄러움이 많은 나는 버스정류장까지 오가는 길에서 여학생 무리라도 마주치면 어찌할 바를 몰라 어색하게 딴 곳만 쳐다보곤 했다. 길을 잃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누나가 셋이나 되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성격은 어쩔 수 없는 법. 남중ㆍ고만 다니다 보니 더더욱 ‘여자’ 학생들과의 대면이 낯설어 피하고만 싶었던 것이다. 최근 건축가들이 학교에 필요한 공간을 리서치하고 디자인하는 레인보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경기도교육청 산하 학교들이 각 건축가에게 배당되는데, 내가 맡은 학교가 여자중학교다. 여중생들 앞에서 꼼짝도 못했던 옛날 생각이 나서 피식 웃었다. 경기도의 한 여자중학교에 ‘메이커 스페이스’라 불리는 공간을 설치하는 게 .. 2021. 3. 19.
이웃 되기의 어려움2 건축은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숱한 민원을 해결하는 일이다. 3년 전쯤 이 칼럼에서 ‘이웃 되기의 어려움’이란 제목으로 건축 민원에 대해 쓴 적도 있다. 살아오면서 상상도 못 했던 불만들이 쏟아져 놀라고 황당했던 경험을 하면서 ‘설마 이보다 심한 경우가 있으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그 후로 3년간 나는 차원이 다른 민원을 겪어왔고 매년 그 강도가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동안 들어주고 이해하면서 해결점을 찾았는데, 요즘엔 해결은 없고 극단으로 향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어째서 이런 일들이 생길까, 나는 아득할 때가 많다. 그러니까 말보다 법을 먼저 들먹이는 상황. 어떤 경우에도 직접 문제의 집으로 가서 주인을 만나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공사 감리자를 불러 내 .. 2021. 3. 19.
도로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신호등을 잘 안 지킨다. 분명 차가 달려오는데 그냥 차도에 내려선다. 빨간불에도 당당하게 길을 건넌다. 달려오던 차는 사람을 보면 무조건 멈춘다. 우리나라에선 운전자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이 xx야!’하며 한바탕 난리가 나겠지만 거긴 자동차들이 조용히 사람들이 다 건너기를 기다린다. 프랑스에 살면서 신기하게 여겼던 모습 중 하나가 어디서든 사람들은 건너고, 차는 서서 기다리는 그 풍경이었다. 그러니까, 신호랑 상관없이 사람이 도로에 내려서면 차는 무조건 멈춘다. 비록 빨간불이어도 ‘사람이 우선’ 이라는 법칙은 신호위반보다 상위에 있었다. 차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얼른 비켜주거나 차의 행로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는데, 도로에서도 사람이 먼저라고? 가만 떠올려보면 도로가.. 2021. 3. 19.
건축 영화 건축은 장면이 아니라 이야기다. 건축가와 집주인과 집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연속된 흐름을 가진 장소다. 건축은 자연, 인간, 도시를 빼고 말할 수 없다. 건축가는 늘 이를 고민하고 그 과정이 건축 속에 투영되며 건축을 해나가면서 건축가 역시 함께 성장한다. 자연, 인간, 도시는 건축의 출발이다. 공기처럼 너무 기본적이고 당연한 것이어서 가끔 그것을 잊기도 하지만, 건축가라면 이를 평생 고민할 것이다. 그러므로 건축에는 건축가의 인생이 통째로 담긴다. 그러나 완공된 건물만 접하게 되는 사람들은 이 과정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건물은 집주인의 요구에 따라 지어지는 것 아닌가, 어떻게 건물 하나에 자연과 인간과 도시를 담는다는 말인가, 그렇게 건축이 대단한가, 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 2021. 3. 19.
건축가 없는 집 어느 유명 배우의 집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방송에 멋진 집이 등장했는데, 하자가 생겨서 건축주와 시공사 간에 다툼이 오가고 소송으로 진행된 것이다. 서로 잘못한 게 없다는 두 사람의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뉴스가 된 것만으로 충분히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나는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이 사건에서 건축가는 어디 있나? 건축주와 시공사는 있는데 가장 중요한 건축가가 없다. 건축가가 없는 집이니, 이 집은 태생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을 수밖에. 건축주인 배우는 자신이 직접 집을 설계했다고 누차 이야기했다. 과연? 연예인이 집을 소개하며 본인이 직접 설계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일반인이 알고 있는 ‘설계’와 건축가가 하는 ‘설계’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게 된다.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직.. 2021. 3. 19.
쓰레기 옆 CCTV 아름다운 골목이었다. 그 다음 날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인 것을 보기 전까지. 언덕 끝에 있는 사무실로 향하는 골목길이 사람 사는 냄새로 가득한 길이라고 생각했지 쓰레기의 무법지대일 줄은 몰랐다. 사무실 담벼락 너머에 연립주택 거주자들의 생활 쓰레기가 하루가 멀다 하고 쌓였다. 쓰레기에 예민해진 것은 처음 작업실을 얻었던 십여 년 전부터였다. 새 작업실로 이사하자마자 공무원이 쓰레기 배출 정보가 담긴 스티커를 붙여 놓고 간 것이었다. 아파트에 살면서 크게 의식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골목길에 면한 작은 사무실에서는 신중해야 할 사안이었다. 주택들이 많고 골목길이 복잡한 곳일수록 쓰레기 배출은 해결이 쉽지 않은 과제였다. 그래서 새 사무실을 얻자마자 용산구는 쓰레기 배출을 어떻게 하나 주민센터에 문의해서 정확.. 2021. 3. 19.
어느 건축가의 여행법 여행은 걷는 일로 시작해 걷는 일로 끝난다. 길이 나오면 걷는다.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서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골목은 다른 골목으로 이어지거나 공원이 나오면서 다른 동네의 시작을 알린다. 걸으면서 보면 풍경은 고생보다는 보물이다. 도시에는 많은 요소들이 있어 산책을 즐겁게 해준다. 길을 잃을라치면 멀찍이서 방향타가 되어주는 특색 있는 건물,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즐겁게 해주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파는 상점가, 코를 자극하는 극한의 마력을 지닌 맛집들, 잠시 쉬어가라 유혹하는 나무 그늘과 커피잔이 놓인 파라솔, 한번 들어가면 빈손으로 나올 수 없는 쇼핑몰, 왠지 차분해지고 들뜨게 되는 서점, 언제나 만족도가 높은 미술관, 박물관들. 이런 장소들의 유혹 때문에 휴양지보다는 도시로의 여행이 더 .. 2021. 3. 19.
고양이와 강아지와 단풍나무의 집 땅의 주인은 누구일까? 건축주만의 것일까? 설계 의뢰를 받고 가보면 여러 가지 풍경들이 나를 맞는다. 주변에 집도 없고 빈 땅만 있는 경우라면 문제될 것도 없어 순탄하게 설계를 진행하면 된다. 그러나 그 땅에 멋진 나무나 바위가 있거나 주변에 집들이 모여 있다면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이 나무와 바위를 없애는 것이 옳을까? 신축이라고 하면 빈 땅에 집을 짓는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특히 울창한 나무들이 있다면 고민은 깊어진다. 충북 음성에 짓고 있는 이 집은 나무가 많았다. 지어질 집의 위치가 남쪽이 좋다고 판단해서 자그마한 나무 몇 그루를 옮겨심기로 했다. 그때가 겨울이어서 가지도 앙상하고 나무도 작아 보여 그렇게 결정했다. 건축주의 부모님이 그곳에 있는 단풍나무를 어여쁘게 여겼기.. 2021. 3.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