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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그리는 그림 발톱을 깎다가 물끄러미 내 발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의 발은 참 신기하다. 작은 발에 발가락이 10개나 붙어있다. 뭐가 저렇게 많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건을 집거나 기구를 다루는 것에 알맞게 만들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걷는 것’만큼은 용이하게 만들어져 있다. 발은 걷는 순간 본래의 역할을 시작한다. 많이 걸어야지 하면서도 그게 잘 안 된다. 건강을 위해 하루에 1만보 이상 걷겠다고 다짐하고 스마트폰에 만보계 앱을 깔았지만 날마다 붉은 색의 막대만 늘어난다. 차를 가져가면 심지어 200보가 안 되는 날도 있다. 인간은 직립보행한 이후부터 쭉 걷고 또 걸었다. 인간의 걷기는 길을 만든다. 우리가 걷는 길,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인간이 걸으며 만들어져 .. 2021. 3. 17.
집은 사람이 살아야지! “집은 사람이 살아야지! 안 그러면 망가져!” 강화도 솔정리 고씨 가옥이라는 문화재 고택에서 들었던 할머니의 말씀이다. 한 방송국 촬영팀과 함께 강화도 근대건축 답사를 다녀왔는데, 촬영 말미에 방문했던 고택에서였다. 할머니는 강화도에서 내로라하는 부잣집 며느리로 평생 살아왔는데, 이제 그 집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게 되었다. 집이 문화재가 되면서 건물 보존의 이유로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할머니 가족은 바로 옆에 현대식 주택을 짓고 생활한다. 할머니로부터 이 집을 지은 유래와 당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할머니는 온 가족이 모여 살던 그 시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갓 시집와서 썼던 방, 도련님방,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방을 차례대로 설명했다. 할머니 이야기는 광대하게 넓은 부엌과 찬방에서 절정에 달했다.. 2021. 3. 17.
돌아온 거 환영한다 주말 외식은 동네 맛집이 최고다. 이 동네에 산 지 벌써 20년, 동네 맛집 리스트가 차곡차곡 늘어간다. 식구 모두 오래된 맛집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 리스트를 수정해야 할 일이 생겼다. 늘 리스트의 상위에 있던 ‘막국수’ 식당이 문을 닫은 것이다. 안 그래도 한번 가야지 하던 차였는데... 아뿔사! 늦어버린 것이다. 막국수 식당 자리는 주택 재건축이 한창이었다. 동네 일대가 건물을 철거하는 중이었다. 식당 건물은 흔적도 없고 어디로 이전했다는 현수막이나 안내문도 없다. 깊은 상실감. 또 어디서 그런 맛을 찾는단 말인가. 그 비빔막국수의 오묘한 맛을... 떠나는 것이 있으면 돌아오는 것도 있는 법. 이 허탈한 마음을 채워줄 귀환자의 소식이 들린다. 10대 시절 최고의 공간, 세운상가가 .. 2021. 3. 17.
펜으로 만들어지는 세상 만화가게는 보물창고였다. 돈만 생기면 그곳으로 달려갔다. 어렸을 적에 말이다. 나는 상상력이 풍부했던 편이었고 만화 속 이야기들은 다른 세상으로 나를 불러냈다. 만화가게 가려고 돼지저금통의 배를 딴 적도 있었다. 엄마한테 딱 걸렸는데 만화 본다고 하면 혼날 것 같아 거짓말을 둘러댔다. 그땐 만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이제 만화를 보고 즐길 뿐이지만 이런 내가 그리 나쁘지 않다. 동네에 만화박물관이 있다길래 산책길에 들렀다. 애들이나 가는 데라고 대충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볼 게 많았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들었던 전설적인 만화들 앞에서는 반가운 마음에 전율까지 일었다. 만화가의 손놀림이 그대로 남아있는 원화를 보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만화가의 청년시대를 주제로 한.. 2021. 3. 17.
카페에 거는 작은 기대 처음 사진을 봤을 때 마음이 들떴다. 독특한 디자인의 카페와 풍광 좋은 자연, 역사적 이야기가 있는 본채 등등에 마음이 혹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이름이 ‘굿모닝 하우스’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일요일 오후에 급작스럽게 수원까지 간 것도 이런 기대감 때문이었다. 멋진 곳에서 느긋한 휴일 오후를 보내고 싶었고, 근대건축의 새로운 쓰임에 늘 관심이 있었기에 얼른 가서 보고 싶었다. 기대가 깨지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옛 공관의 간결한 디자인, 마당 너머로 신축한 카페의 비정형 디자인은 보는 즐거움을 충분히 주었다. 건축가가 많은 고민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카페 내부에서 내 시선에 잡힌 것들은 기분 좋은 발걸음을 막아 서고야 말았다. 어수선하게 배치된 의자와 한쪽에 밀쳐져 있는 각종 행사.. 2021. 3. 17.
현장의 목소리 “그걸 고치면 800만원 밑집니다. 경제도 어려운데 좀 봐주십쇼.” 다급한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날아든다. 공사현장의 목수반장이다. 공사가 도면과 다르게 되어있어 바로잡으려 할 때면 늘 듣는 소리다. “어려우신 건 알지만 저도 어쩔 수 없어요. 다시 고쳐야 합니다. 거긴 그냥 넘어갈 부분이 아닙니다!” 내 목소리도 커진다. “어제도 벽체 틀리셨잖아요. 그건 그냥 넘어갔지만 이건 안됩니다, 절대!” 대화는 좀 더 이어졌지만 서로 입장차이만 확인하고 끝났다. 시공사 대표에게 강력히 항의한 끝에 상황은 강제 종료되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나면 다음날 현장에 가는 것이 망설여진다. 분명 분위기가 좋지 않아 감리 나온 건축가를 고깝게 볼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소장님 반장님 하며 좋던 사이가 한 순간이 어그러진다.. 2021. 3. 17.
좋은 창의 비밀 유리창은 아름다운 발명품이다. 창으로 인해 집 안의 삶은 획기적으로 아름다워졌다. 내부에서 바깥을 본다는 것, 비도 바람도 어떤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면서 안전하게 바깥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삶과 집에 극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창의 아름다움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좋은 집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물리적으로 좋은 요소, 심리적인 좋은 요소 등으로 무장한 스펙 좋은 집을 설명하려다가 결국 이렇게 대답하게 된다. “많은 노력을 들인 집이 좋은 집에 가깝지 않을까요”라고. 그런데 이것만은 이야기할 수 있겠다. 공들인 집과 아닌 집의 차이는 창문에서 드러난다고. 얼마 전 건축주와 함께 주택단지를 보러 갔다. 풍경 좋은 산의 한쪽 사면을 모두 택지개발해서 분양하는 곳으로 대부분 시행사가 만.. 2021. 3. 17.
논쟁의 도시 용도 폐기된 서울역 고가를 보행로로 바꾼 ‘서울로7017’에 대해 SNS상의 반응이 뜨겁다. 근래 이렇게 논쟁적이고 뜨겁게 타오른 건축 주제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호평과 혹평, 감상평이 다양하다. 내 페이스북에도 다양한 의견이 올라왔지만 호평보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더 크다. 비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더 열심히 표현하기 때문일까? 어느 페친은 오픈 전부터 혹평을 쏟아내다가 서울로를 다녀온 뒤로는 더욱 흥분해서 목청을 높였다. 이해할 수 없는 직선적인 비난에 적잖이 불편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숨기기 기능을 사용하고야 말았다. 비난의 포인트는 다양하다. 고가도로를 보행로로 바꾼 시도 자체를 비난하는 것부터 설계에 대한 실망감(2등 안이 더 좋았다는 의미)을 토로하기도 하고, 콘.. 2021. 3. 17.
밤의 종묘 밤은 오묘한 시간이다. 낮에 뻔하던 것들도 적당한 빛을 주면 이내 다른 공간으로 변한다. 일상적이고 이성적 공간이 감성적이고 낭만적으로 변한다. 과도한 빛으로 불쾌해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밤과 건축은 재미난 관계다. 낮의 에펠탑과 밤의 에펠탑은 냉정과 열정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 같지 않은가. 프랑스 유학시절 살았던 리옹이라는 도시는 고대부터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까지 시대별로 유적이 많았다. 집 근처 쏜 강(청계천 정도의 넓이)을 건너면 시간여행을 하듯이 훌쩍 과거가 펼쳐졌다. 문화유산과 관련한 행사들이 자주 열린 덕에 재미있는 경험도 많이 했다. 푸르비에르 언덕 위에 있던 고대로마의 원형극장에 대한 기억은 강렬했다. 책으로만 보던 원형극장을 처음 대면했을 때 신기한 감정으로 둘러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2021. 3.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