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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공간 나는 커피를 하루에 세 잔 이상 마신다. 단 음료는 한 잔 이상 마시기 어렵지만 커피는 연거푸 여러 잔도 가능하다. 커피는 노동의 음료라고 했던가? 일할 때 커피만큼 알맞은 음료도 없는 것 같다. 집중해서 일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할 때, 회의할 때, 어딘가 손님으로 찾아가서 기다릴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물음. “어떤 커피 하실래요?” 길거리에 두세 집 걸러 한 집은 커피숍일 정도로 커피가 장악한 시대를 살고 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도 커피숍이 있었지만 여학생과 미팅할 때나 갔고, 그조차도 지금의 카페와는 분위기가 영 달랐다. 그때 학생들에게 커피의 공간이라면 학생회관이나 도서관의 커피 자판기 근처였으리라. 커피 자판기는 끽다와 흡연의 장소이자 휴식과 담소와 회합의 장소였다. 다 마신 종이컵을 눌.. 2021. 3. 17.
검문 당하는 남자 불심검문 한번 당해보지 않은 청춘이 있을까마는 나는 어려서부터 검문을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 키가 컸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는 집 앞을 나서자마자 경찰에 붙들려 가방을 열었고, 정독도서관에 자주 가던 고등학생 시절엔 백이면 백 경찰이 보는 앞에서 소지품 검사를 당했다. 종로 쪽으로 갈 때도 검문은 끊이지 않았는데, 이유는 ‘민정당’ 당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재미난 것들로 가득 찼던 종로 거리를 걷는 일은 어린 내게 큰 재미였으나 그만큼 답답하고 불편한 일이기도 했다. 팔십 년대의 일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설계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한 1996년 겨울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카메라를 들었다가 소위 닭장차(전경버스)에 끌려갔다. 집회에 참여했다거나 시국선언을 한 .. 2021. 3. 17.
감동의 배신 여행을 즐기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유명한 관광지보다는 무작정 길을 걷거나 가능하면 보통 사람들이 거주하는 주택가 골목길을 거닐곤 한다. 오래되고 범상치 않아 보이는 집이 눈에 띄면 이리저리 둘러보고 들어가 본다. 우연히 보물을 발견하는 즐거움이야말로 여행의 본질이다. 얼마 전 도쿄를 방문했을 때도 숙소 근처의 골목길을 무작정 걸었다. 산책하려면 큰 도로를 따라가는 것보다는 한 블록 뒤쪽의 작은 도로가 더 흥미로운 법이다. 옹기종기 모인 집들의 안락한 느낌에 몸을 맡기고 걸어가는데, 멀리서 길게 둘러진 담장이 눈에 들어왔다. 담장 너머로는 잘 자란 향나무들이 빼곡하게 보였다. 공원이 아니면 사찰인가 싶었다. 나이가 지긋하고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따라 담 안쪽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니 호기.. 2021. 3. 17.
건축가의 선택 작업실이 이사한 후 남영역을 주로 이용하게 되었다. 전철역 플랫폼에 벽돌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세로로 난 좁은 창문과 검정색 벽돌이 인상적인데, 이곳은 과거 서슬 퍼렇던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김근태 씨가 모진 고문을 당했고, 1987년 1월 학생 박종철이 끌려가 물고문 끝에 죽임을 당했던 그곳이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바뀌었다. 이 불편한 장소를 매일 아침저녁 보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디자인이 무척 세련되었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답다. 김수근의 그림자라고도 불린다 한다. 한국건축사에 한 획을 그었던 선배 건축가가 사람을 잡아다 고문하는 건물도 설계했다니,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프로젝트를 처음 의뢰 받았을 때 건축가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건축가는 이곳이 .. 2021. 3. 17.
도면의 숫자가 말해주는 것들 집을 지으려면 수많은 도면과 만나야 한다. 근교에 전원주택을 짓는다고 가정해보자. 건축주는 건축도면 말고도 토목도면이란 걸 보게 될 것이다. 제대로 짓고자 마음먹었다면 가구와 인테리어 도면도 같이 살펴봐야 한다. 법적으로 정해진 도면만으로는 좋은 집을 짓기 어렵다. 세부적인 부분을 보안해주는 상세한 도면들이 더 필요하다.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에 나타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은데, 이를 풀어낸 상세한 도면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공사현장에서는 알아서 멋있게(?) 처리해 버린다. 도면은 건축주와 건축가의 의도가 모두 들어있는 것이며, ‘이대로 지어주시오’라고 현장에 요구하는 자료다. 그러므로, 도면에는 가능한 모든 의견들이 그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 건축도면은 복잡한 수치와 선들로 가득하다. 건축, 구조, 설비.. 2021. 3. 17.
진짜 끝은 언제일까 지난 연말은 드라마틱했다. 한해의 마지막 날을 며칠 앞두고 그동안 해온 주택 프로젝트가 모두 끝났기 때문이다. 3년을 끌어온 일 하나가 마지막까지 발목을 잡았으나 결국은 사용승인허가가 떨어졌다. 이로써 홀가분하게 웃으며 한해를 정리할 수 있었다. 리모델링과 신축을 오가며 주택을 짓는 일에 몰입했던 제법 괜찮았던 2016년으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들로 분주하게 새해를 시작했지만 지난 해 공사 프로젝트 폴더는 아직도 컴퓨터 안에 남아있다. 행정절차도 마무리되고 집주인도 입주했으니 일이 다 끝난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집주인과 고민해가며 완성한 설계가 실제 생활에서 잘 사용되는지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혹시나 있을 하자보수도 잘 해결해야 함은 물론이고. 실제로 집은 봄여름가을겨울의 네 계.. 2021. 3. 17.
길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친하게 지내는 부부와 저녁을 같이 먹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편이 초등학교 후배다. 그런 이유로 만날 때마다 옛날 동네 추억을 나누게 된다. 그는 옛날 살던 그 동네가 재건축이 결정되어 곧 없어진다고 했다. 즐겁게 식사를 끝내고 돌아왔지만 마음 한구석이 계속 무거웠다. 없어지기 전에 추억 속의 장소에 가보고 싶었다. 바쁘던 일이 끝나자마자 그 동네, 휘경동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휘경초등학교. 35년 만에 방문이었으니, 옛 기억 속의 학교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학교의 자랑거리였던 야외수영장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병설유치원이 생겼다. 교사를 신축하느라 운동장도 줄어들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정문에서 교사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송충이가 우수수 떨어져서 무서워했던 그 길, 그 나무들은 여전했.. 2021. 3. 17.
윗집 옆집 쿵쿵, 쾅쾅, 드르륵드르륵, 사각사각……. 밤늦은 시간인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윗집이다. 얼마 전 새로 이사를 들어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 층.간.소.음. 이 아파트에서 15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피아노 소리를 빼곤 층간소음을 모르고 살아왔는데 그건 행운이었던 모양이다. 윗집 소음은 특히 밤에 잘 들렸다. 가구를 끄는 소리도 아니고 TV소리도 아니고 말소리도 아닌, 이 소음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9시가 되면 주무시는 부모님과 함께 살기에 이 시간 이후는 거실에서 살금살금 다니고 가능한 소음을 내지 않았던 터라, 뒤늦게 찾아온 괴상한 소음이 짜증스러웠다. 거슬리는 것은 둘째 치고 도대체 이 괴상한 소음의 정체가 뭔지 궁금했다. 인테리어 공사를 하면서 소음이 아랫집으로 잘 전달되는 바닥재를.. 2021. 3. 17.
마지막 집 내 삶의 마지막 집은 어떤 집일까. 완공을 앞둔 주택의 건축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 노부부가 산책길에 공사 중인 그 집에 들러 이것저것 묻고 갔다고 했다. 새로운 건축주를 만나게 될지 모르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미다. 내가 설계한 집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니 어깨에 날개가 돋친 듯 기분이 두둥실 떠올랐다. 이틀 후 그 노부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용은 간단했다. 노부부는 10년 전에 가족들이 함께 살 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사이, 장성한 자식들이 모두 결혼해서 모두 나갔다. 이제 두 사람이 살기에 너무 큰 집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지금 집을 처분하고 바로 앞에 있는 조그만 땅에 부부가 살기에 알맞은 집을 짓고 싶다는 것이다. 다음날 방문해보니 노부부의 집은 노출 콘크리트로 잘 지.. 2021. 3.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