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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기록 사무실에 작은 흙마당이 있다. 작년 여름에 이 집이 아주 맘에 들었던 데는 이 흙마당의 역할이 컸다.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잡풀과 야생화들이 무성했지만 그것대로 생명력이 넘친달까? 다만 넝쿨째 자라는 부스스한 장미는 부담스럽기는 했다. 건물은 알아서 손을 보겠는데 정원은 대체 어떡해야 하는지. 정원 프로젝트,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숙제가 될 것 같았다. 집을 수리하고 사무실 정리를 하느라 여름과 가을을 보내 버린 뒤 겨울의 흙마당은 거무스름하게 마른 잡초만 남아 있었다. 봄이 되면 뭘 해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건 없고, 작은 화단이 볼 때마다 고민이었다. 그 사이 한 것이 있긴 하다. 잡풀들은 다 숨 죽고 갈색으로 변해 가는 넝쿨 장미의 부스스한 헤어를 깔끔하게 잘라 준 것이다.. 2021. 3. 19.
시대를 말해주는 집 서울의 어느 주택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이 든 여인이 혼자 살던 오래된 이층집이다. 잘 꾸며진 커다란 드레스룸과 파우더룸, 벽난로를 갖춘 넓은 마루, 꽃나무가 근사하게 어우러진 정원,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와 볕이 드는 선룸까지 갖추었으니 근사한 집이 틀림없다. 조명과 주방 찬장까지 섬세한 손길이 닿아 있다. 원래의 집이 마음이 들지 않아 유명한 건축가에게 맡겨 이쁘게 고쳐 지은 집이다. 둥그렇게 벽돌을 쌓아 만든 벽난로와 따뜻한 색조의 스테인드글라스는 그 건축가의 특성이다. 아침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할 때면 여러 가지 색이 바닥에 비췄겠다. 창문 아래 라디에이터 그릴도 고급스럽게 바꾸었다. 건축가와 어떻게 인연을 맺고 어떤 요청을 했는지는 온전히 비밀이다. 그러나 건축가가 고민한 것들이 무엇.. 2021. 3. 19.
보이지 않는 곳이 중요하다 집을 지을 때 첫 번째 만나는 난관은 공사 견적이다. 크게 복잡하지 않은 신축 주택의 공사 견적을 받았다가 깜짝 놀라곤 한다. 건축 재료도 오르고 인건비도 많이 상승했다지만, 해가 다르게 견적이 뛰어오른다. 집을 짓는 일은 점점 만만치 않은 일이 되어 간다. 설계에서 너무 복잡한 부분이 있었나 되돌아보기도 한다. 무조건 가장 저렴한 업체를 선택하는 건 물론 아니다. 비용도 알맞고 실력도 좋은 시공자를 찾는 것과 별개로, 집주인의 예산 범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안을 조정하며 견적을 맞춰 가는 작업도 동시에 한다. 먼저 가구류부터 도면에서 삭제한다. 살면서 하나하나 마련하는 것도 재미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분명 눈에 띄게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 다음으로 정원이나 외부의 마루 데크를 삭제한다.. 2021. 3. 19.
남자들의 놀이터 “저에겐 이 오디오가 정말 소중해요”라고 건축주는 말했다. 앰프와 스피커를 어디에 놓을지, 흡음판은 어떻게 배치할지, 좋은 계획을 세워 달라면서. 스피커와 앰프는 배선도 깔아야 하고 고가의 고출력 오디오는 별도 전기선이 필요해서 설계 단계부터 제대로 계획해야 한다. 좋은 소리를 위해 오디오가 놓일 공간과 위치도 미리 잡아놓아야 한다. 오디오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100% 남자 건축주다. 확실히 남자들이 오디오에 열광한다. 음악에 관심이 없더라도 오디오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성능 좋은 기계에 대한 관심이거나,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소리에 대한 관심일 수도 있다. 사실, 나도 좋은 소리를 들려주는 이 아름다운 기계들을 무척 좋아한다. 지난 주말, 서울국제오디오쇼에 가보았다. 주 관람객은 40대~6.. 2021. 3. 19.
건축가의 마지막 프로젝트 건축가가 주인공이라는 말에 혹해서 영화관에 갔다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을 했다. 히어로물이나 SF를 사랑하는 내가 작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감동하는 일은 극히 드문데 이 영화는 달랐다. 직업적 공감대도 있었지만 나이 드는 것이 참 멋진 일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되어서였다. 일본 아이치현 가스가이시 고조지 뉴타운의 귀퉁이에 목조 가옥을 짓고 살아가는 90세, 87세의 부부가 주인공이다. 건축가 슈이치씨는 1960년대 고조시 뉴타운 계획에 설계자로 참여했다. 그는 자연과 공생을 목표로 산을 중심으로 편안하게 연결된 설계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고도 성장기의 시대적 상황은 그의 계획대로 도시가 만들어지도록 놔두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콘셉트였던 산을 허물고 그곳에 더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 2021. 3. 19.
세 도시의 맛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맞이하는 것은 우리 부부의 오랜 습관이다. 일 년을 마무리하는 여행이라서 서너 달 전부터 어느 도시로 갈지 슬슬 찾기 시작한다. 나름의 법칙도 세워 두었다. 첫째, 인기 있는 여행지는 절대 가지 않는다. 둘째, 오래된 소도시를 찾는다. 셋째, 잘 먹고 푹 쉬기. 이번에 선택한 도시는 부여-공주-논산이다. 부여는 아버지의 고향이어서 본가 친척들이 산다. 할아버지가 계실 때만 해도 집안 행사를 치르러 자주 왔다. 기차가 다니지 않아서 복잡한 경로로 할아버지댁을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리조트와 아울렛 단지가 들어섰지만 도시는 빛바랜 시대에 멈춰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백제 유적지로 공주와 부여가 등재되면서 부여가 조금씩 변화했다. 부소산성과 궁남지, 정림사.. 2021. 3. 19.
집과 가전제품 “고작 며칠 입던 옷을 2주 이상 입겠더라구요. 전자 의류관리기 설치할거니까 자리 좀 만들어 주세요.” 10년 전 설계한 주택의 내부 리모델링을 위해 디자인 회의 도중 드레스룸 계획을 협의하는데 건축주가 이런 요구를 했다. 광고에서 본 그 제품을 건축주 가족은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10년 동안 건축 자재와 기술은 크게 변했다. 창호의 성능은 더 좋아졌고, 조명 디자인이나 내부 마감재도 선택의 폭이 다양해졌다. 건축주의 취향도 바뀌었다. 무엇보다 집에 들어가는 전자제품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우선 교체 대상은 TV다. 그땐 32인치도 컸는데, 이제는 60~70인치를 고른다. 세탁기만 있던 다용도실에는 같은 크기의 건조기가 얹혀졌다. 드레스룸에도 전기 콘센트가 많이 필요하다. 드레스룸에 세탁기.. 2021. 3. 19.
뽁뽁이의 계절 이리저리 증축된 일본식 가옥을 손봐서 사무실로 쓰게 된 지도 벌써 넉 날, 슬슬 월동 준비를 해야 할 때다. 옛날집들이 밀집된 이 동네는 뽁뽁이(에어캡)나 두꺼운 비닐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창문은 기본이고 현관문, 심지어 건물 외벽 전체에 둘러놓는 경우도 이따금 보인다. 얼마나 추웠으면 저럴까 싶었는데, 이제는 남일이 아니다. 우리 사무실도 춥다. 일제강점기 지어진 건물답게 단열과는 담을 쌓은 집이다. 과거에는 온돌도 없이 다다미를 깔고 살았을 것이다. 그마나 증축된 부분은 온돌이 깔렸지만 전체적으로 집을 데우기엔 역부족이다. 언덕 높은 곳에 집이 있어 바람길을 지난 바람의 강도가 장난이 아니다. 내부를 살펴보니 벽지 아래에 그나마 얇은 단열재를 붙여놓기는 했다. 이층 천장의 근사한 트러스 구조물이 탐.. 2021. 3. 19.
원로의 품격 건축설계에는 답이 없다. 대학에서 첫 설계 수업 때 들은 이야기다. 지금도 많은 학생들이 이 말을 들으며 건축공부를 시작할 것이다.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답이 나올 때까지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하게 된다. 밤샘 작업도 한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계획안이 나오면 다행이지만 내 맘에 든다고 반드시 교수 마음에 드는 건 아니어서 좋지 않은 비평이라도 나오면 깊은 상심에 빠지기도 한다. 건축물은 내가 설계하지만 사용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건물의 규모가 커질수록 많은 사람이 사용하며 더 많은 주변 환경도 더 많이 고려해야 한다. ‘공공성’이 더 커진다. 그래서 어렵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도 없거니와 막상 지어지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건물이 지어졌는데 이런저런 문제로 많은 .. 2021. 3.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