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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68

마당의 작은 전쟁 여름이 시작되자, 한 평짜리 마당은 전쟁터가 되었다. 꽃나무와 잡초들이 서로 더 넓게 살겠다고 공간을 차지하기 바쁘다. 터줏대감 장미넝쿨은 지정석을 차지하고서 아치형 입구를 가득 덮었다. 이 집의 상징이자 실질적인 고참인데 5월에 장미가 필 때면 이 집은 골목에서 가장 예쁜 집이 된다. 나를 장미넝쿨집 아저씨라고 불러주길 바랄 정도다. 마당의 2할을 차지하고 있는 녀석은 딸기다. 작년에 손바닥만 한 모종을 5개 정도 심었는데, 겨울의 한파를 이겨내고 당당하게 마당의 앞쪽을 차지했다. 햇빛이 잘 드는 ‘로열층’을 집터로 잡은 것이다. 게다가 딸기까지 무수하게 열리니 넘버2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뻗어나가는 기세가 놀랍다. 내년쯤에는 마당의 나머지까지 독차지할까봐 걱정되기도 한다. 담벼락 근처의 공간은 그야.. 2021. 3. 19.
코로나 시대의 아이들과 학교라는 공간 올해 야심차게 학교 공간 혁신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처음 맞닥뜨린 장면이 학생 없는 학교였다. 그래도 디자인 작업은 계속되었다. 등교가 시작되자마자 놓칠 새라 학생들과 워크숍 자리를 만들었다. 1m 이상 거리두기를 하고 자리에 앉아 마스크를 쓰고 이야기를 나눴다 질문부터 던져보았다. 학교에서 가장 좋은 공간은 어디인가? “어디가 좋은지 몰라요!”라고 아이들이 쑥스럽게 답했다. “오늘이 학교에 두 번째 온 건데요. 다 돌아보지도 못했는걸요.” 중학교 1학년이다. 뉴스에서 익히 들어왔지만, 실제로 맞닥뜨리니 충격이었다. 나름 분위기를 만들어본다고 시도한 질문인데 턱도 없다. 코로나로 인해 학교에 겨우 두 번째 나온 아이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던 것이다. 연속성도 없다. 학년별로 나오는 날이 달라서 오늘.. 2021. 3. 19.
건축주와 보낸 하루 나는 처음 건축주와 연락한 날짜를 프로젝트 번호로 기록한다. 정식계약이 아니어도 전화 통화를 나누거나 프로젝트 검토를 한 날이 시작일이 된다. 180904는 홍제동주택의 프로젝트명이다. 올해 2월에 준공이 되었으니 설계와 시공에 18개월 정도 걸렸다. 집주인으로부터 집 구경하러 오라는 초대를 받고 일주일 전부터 즐거웠다. 1년 넘게 현장을 다녔고 여전히 머릿속에 설계도면이 다 들어 있지만 온전히 건축주의 공간이 된 집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집이 완공되어 건축가의 손을 떠난 뒤엔 보고 싶은 마음도 내려놓는 쪽이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아직 이사 오기 전, 주방 가구조차 마무리가 되지 않았을 때였다. 살림살이가 들어오면서 집 분위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그 공간에 어울릴 작은 선물.. 2021. 3. 19.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는 건축가들 건축가들은 만드는 걸 좋아하는 부류다. 어릴 때부터 시계나 전자 제품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데 격한 재미를 느끼다가 건축가라는 직업을 택하게 되었다는 주변인들도 꽤 있다. 프라모델이나 피규어 등이 놓인 건축사무소도 자주 보인다. 손으로 형태를 만들어보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이다. 호모 파베르. 도구적 인간이라는 말이 건축가를 두고 나온 말이 아닌가 싶다. 전 세계가 코로나로 인해 대혼란을 겪는 지금,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건축 쪽도 사정이 어려워졌다. 건축가는 만드는 일에 있어선 전문가 집단이다. 궁리하고 만들어내며 사회적 난제에 참여하는 건축 집단의 이야기를 소개해보려 한다. 우리야 전 국민이 마스크를 충분히 사용하고 있지만 다른 나라들은 마스크와 보호 장비들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는 건 이미 알려.. 2021. 3. 19.
멈춰선 도시 유튜브로 전 세계와 실시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요즘처럼 흥미진진한 적이 있을까?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이전보다 자주 유튜버들의 현지 소식을 찾아보곤 하는데, 요즘 가장 빈번히 보이는 건 텅 빈 도시의 풍경이다. 그렇다. 도시가 멈췄다. 파리의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는 사람이라곤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고 런던의 명물 대관람차인 런던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트래픽 지옥이라는 뉴욕 맨해튼은 이따금 경적을 울리는 앰뷸런스나 경찰차를 빼곤 차가 한 대도 없다. 이런 건 살면서 처음이라고 말하는 현지인들은 놀라움을 넘어서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바티칸 교황청 앞 넓디넓은 성 베드로 광장에 교황이 홀로 단상에 올라 세상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은 고독하고 슬펐다. 에펠탑에는 코로나와 맞서고 있는 의료진에게 감사의 .. 2021. 3. 19.
3D 프린터와 건축의 진화 열흘 만에 병원을 지을 수 있을까? 중국 정부가 우한시에 1,000여개의 병상을 가진 대형 병원을 단 열흘 만에 짓겠다는 계획이 발표되고 얼마 뒤, 수십 대의 포클레인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밤낮 없이 콘크리트를 붓고 자재를 나르더니 놀랍게도 열흘 만에 병원이 지어졌고 환자 병동이 꾸며졌다. 이 과정은 인터넷에 계속 중계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지켜봤다. 그저 포클레인이 왔다 갔다 하는 단순한 영상일 뿐인데도 그 광대한 땅을 오가는 수많은 공사 차량이며 그 스케일이 너무 놀라웠기에 잊히지 않았다. 이것이 중국이구나! 당연하게도 이 병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형병원처럼 시설이 완비된 건물은 아니다. 내부는 단순하고 열악하기까지 해서 병원이라기보다 수용소처럼 느껴진다. 이는 오로지 코로나19.. 2021. 3. 19.
지키는 사람들 사용 승인일 1982년 11월 15일. 연와조, 지하 1층, 지상 2층. 성수동에 있는 주택의 생일과 크기를 말해주는 정보다. 건축물대장에는 건물의 사용 승인(준공) 날짜가 나온다. 생일인 셈이다. 이 집은 38년 전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잘 살아왔지만 다음 주에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상업건물 신축을 위해 철거되기 때문이다. 서울이라는 도시 안에 뭔가를 짓게 되면 늘 맞닥뜨리는 상황이지만 항상 아쉬움과 시원함이 공존한다. 40년가량 이 땅에 앉아 있던 누군가를 밀어내는 것 같고, 잘 살고 있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만 새로운 건축을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숙제라서, 철거하고 나면 시원하기도 하다. 두 가지 마음의 공존. 적응할.. 2021. 3. 19.
반지하 다시 보기 ‘기생충’은 건축과 서사가 절묘하게 엮인 영화다. 삶의 현격한 격차를 보여 주는 고급주택과 반지하 공간은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피부에 닿는 듯 생생하고 날카롭다. 영화에서처럼 모든 반지하가 ‘빈곤’을 상징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지하=저렴한 주거’라는 인식은 만연되어 있다. 보통 오래된 주택이나 연립에 있다 보니 노후되었고 설비나 환경이 열악하다. 저렴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만만한 주거이기도 하다. 한편, 홍대나 신사동에서는 반지하 주거가 상업용으로 전환되면서 활발한 변화가 일어나 멋지고 이색적인 상업공간으로 전환되는 중이다. 반은 지상, 반은 지하인 공간, 즉 지층에 창문이 걸린 희한한 층이 어쩌다 생겨났을까? 지하 층 주거는 1970년, ‘방공호’의 개념으로 단독과 연립주택에 지하층을 의무.. 2021. 3. 19.
학교는 변하고 있다 어릴 때 살던 우리집 옆에는 여자중학교와 여자고등학교가 있었다. 유난히 수줍음과 부끄러움이 많은 나는 버스정류장까지 오가는 길에서 여학생 무리라도 마주치면 어찌할 바를 몰라 어색하게 딴 곳만 쳐다보곤 했다. 길을 잃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누나가 셋이나 되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성격은 어쩔 수 없는 법. 남중ㆍ고만 다니다 보니 더더욱 ‘여자’ 학생들과의 대면이 낯설어 피하고만 싶었던 것이다. 최근 건축가들이 학교에 필요한 공간을 리서치하고 디자인하는 레인보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경기도교육청 산하 학교들이 각 건축가에게 배당되는데, 내가 맡은 학교가 여자중학교다. 여중생들 앞에서 꼼짝도 못했던 옛날 생각이 나서 피식 웃었다. 경기도의 한 여자중학교에 ‘메이커 스페이스’라 불리는 공간을 설치하는 게 .. 2021. 3.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