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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우리에게 필요한 상상력

by 봉볼 2021. 3. 17.

따뜻한 물이 안 나온다. 온수관이 얼어버렸다. 얼마나 노심초사했는데! 수도관이 얼까 봐 기온이 영하로 조금만 떨어져도 수돗물을 똑똑 흐르게 틀어두었다. 보일러가 얼까 봐 밤에도 2시간에 10분씩 돌아가게 예약설정을 해놨다. 작년 겨울을 잘 넘겼기에 올해도 그대로만 하면 될 줄 알았다. 영하 17도가 예고된 날 저녁 집주인 아저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은 온수도 졸졸 흐르게 틀어놔요” 그 당부를 대충 흘려 들은 결과는 아무리 돌려도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 수도꼭지.

보일러회사의 A/S 전화는 아무리 기다려도 연결되지 않았다. 동파가 많은 때라더니, 실감났다. 전화를 끊고 인터넷에서 ‘언 보일러 녹이기’를 찾아봤다. 이런 저런 기술과 기법들이 난무한다. 그 중에서 신뢰가 가는 방법은 헤어드라이어 신공이었다. 드라이어로 30분 정도 쐬면 온수관이 녹는단다. 친절하게 동영상까지. 보일러 회사에서 만든 응급처치 영상이었다. 나는 또 의심한다. 이게 과연 될까? 아쉬운 마음에 주인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내 말대로 안 했어요? 안 틀면 언다니까. 거참.” 네네 하며 듣고 있자니 아저씨가 은밀한 방법이 있다는 듯 말을 꺼낸다. “헤어드라이어 있죠? 그걸로 녹여 봐요.”

보일러에는 네 개의 관이 있다. 급수, 난방 2개(방으로 나가는 따끈한 물과 한 바퀴 돌고 다시 돌아오는 물), 그리고 온수, 그 온수관을 덮고 있는 보온재를 떼어내고 드라이어로 관 전체에 골고루 열기를 불어넣는다. 20분씩 두 번. 싱크대에 온수를 틀어보지만 물이 나올 기미가 전혀 없다. 실외나 다름없는 보일러실에서 영하 17도를 버티자니 나까지 얼어버릴 지경이다. 날은 춥고 몸은 힘들고... 문제는 온수관이 얼어버린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 터지면 수습하기 어려워진다. 그 골든 타임을 나는 알 수 없다. 절반 정도 얼어버린 몸뚱이를 방에서 녹이는데 잠시 후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컥컥 콰콱 콰콰콱!! 번개같이 싱크대로 뛰어가니 온수가 쏟아진다. 너무 반가워서 30년 전 대학 입시 때 합격 수험번호를 확인하던 순간 같았다.

사실 며칠 전 작업실로 오는 길이 너무 힘들었다. 갑자기 한파가 밀려와 전철역마다 스크린도어와 신호기가 오작동을 일으켜 전철이 2배 이상 느린 속도로 전진했고 차 안이 바깥처럼 추웠다. 사람들도 적당히 많았고 난방도 가동되지만 객실 안 온도를 올리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한파로 도시가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픽픽 콱콱 고장 나고 있었다.

문득 이 도시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온도가 얼마일까 궁금해졌다. 정확히 어느 온도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법이나 재료가 특정 온도가 아니라 효율의 관점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도시는 시스템이 점점 복잡해지고 전자화되는데, 이로 인해 추위나 더위에 더더욱 취약한 상태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든다.

건축학개론에서 처음 배우는 것 중 하나는 건축은 ‘쉘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건축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해주는 것이다. 추위와 더위를 해결하기 위해 단열을 하고, 지진에 대비해 내진 구조를 고려한다. 비에 대비해 방수와 배수를 고민한다. 설계에서 아주 중요한 과정이다. 이런 고민에 답할 때는 그 동안 쌓인 데이터가 기준이 된다. 경험적이거나 학술적이거나 참고될 만한 것들은 다 고려한다.

하지만 근래 극심해지는 더위와 추위, 엄청난 폭우, 얼마만큼 파괴력을 가질지 알 수 없는 지진 등은 기존 데이터를 쓸모 없게 만든다. 나는 공간을 만드는 데는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물론, 극한에 대처해야 하는 기술적 부분도 앞으로는 적극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것 같다.

<한국일보 칼럼>

[삶과 문화] 우리에게 필요한 상상력 (hankookilbo.com)

 

[삶과 문화] 우리에게 필요한 상상력

따뜻한 물이 안 나온다. 온수관이 얼어버렸다. 얼마나 노심초사했는데! 수도관이 얼까 봐 기온이 영하로 조금만 떨어져도 수돗물을 똑똑 흐르게 틀어두었다. 보일러가 얼까 봐 밤에도 2시간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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