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주택 설계로 만난 건축주와 회의 중에 나눈 대화는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있다. “집이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내가 세상에서 제일 편한 공간”이라고 대답한 일이다. 이 당연한 말이 왜 그리 마음에 남았는지는 모르겠다. 멋지게 디자인된 집, 특색 있는 재료들로 만들어진 집, 멋진 경관을 가진 집은 많지만 실제로 사는 사람에게 “정말 편하세요?”라고 묻는다면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지 모르겠다. 사는 사람이 제일 편해야 하기에 기준도 제각각이고 답도 다르다. 어쨌든 그 말을 마음에 새긴 후로는 건축주가 무엇에 가장 편안해하고 좋아하는지 알아내려고 다양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 술을 좋아하면 바가 있어야 하고 영화를 좋아하면 AV룸을 만들어주어야 하며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면 기도실이 있어야 한다.
아내에게 가끔 묻는다. “자기는 어떤 집이나 공간이 가장 편해?” 돌아오는 대답은 단순하다. “책장에 책이 가득 있고 거기서 등 따뜻하게 하고 하루 종일 책 읽을 수 있는 공간”이란다. 워낙 책하고 붙어 사는 사람이라 예상은 했지만 고민도 없이 답이 나오는 걸 보면 신기하다. 저렇게 책을 좋아하는구나. “생일에 현금 줄까? 도서상품권 줄까?” 물으면 “도서상품권”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역시 망설임이 없다. 돈으로 책을 사면 되지 않나? 그냥 상품권에 적힌 모든 액수대로 책을 살 수 있다는 게 좋은가 보다. 거의 책 스토커 수준이다.
책을 좋아하는 책 애호가이지만 이미 일곱 권의 책을 쓴 작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아내의 꿈은 책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사는 것이다. 그곳이 집이어도 좋고 도서관이어도 좋고 책방이어도 좋다. 그곳에 있을 때 가장 편할 거란다. 오래 같이 살다 보니 어느새 나도 비슷한 꿈을 꾸고 있다. 도서관이든 책방이든 책이 주인공인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상상을 한다. 아내의 꿈이기에 들어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 나름 욕심을 내서 우리의 상상과 어울리는 공간을 설계해서 실현해 보고 싶기도 하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겠지만 계속 떠올리고 이야기하며 준비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가능하지 않을까?
연말을 보내러 떠난 짧은 여행 중에 들렀던 작은 책방에서 우리 부부의 꿈과 닮은 모습을 보았다. 부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책방은 충북 괴산의 전원마을에 있었다. 집의 거실에 마련된 부부의 작은 책방은 이미 소문이 나서 전국에서 많은 손님이 찾아온단다. 출입문에 걸린 안내문에는 ‘들어오시면 꼭 책 한 권을 사셔야 합니다’라고 적혀있지만 절대 겁나지 않았다. 아내가 절대 그냥 나올 리 없기 때문이다.
주차를 하느라 아내를 미리 들여보내고 뒤따라 들어갔는데, 웬일인지 아내 손에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맘에 드는 책이 없나? 나는 공간의 원칙과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나라도 한 권 사야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책방 주인의 관심사가 무척 다양해서 괜찮은 건축서적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몇 권을 찜해 두고 다시 아내 근처로 오면서 건성으로 “뭐 살 게 없나 봐?”라고 물었다. 아내는 대답 대신 근처에 놓인 책 두 권을 슬그머니 들어올렸다. “다 골라놨지.” 아, 그럼 그렇지. 그냥 지나갈 리가 없지. 나는 이제야 맘 편히 책방 공간을 둘러볼 수 있었다. 역시 책은 아내, 공간은 남편이다. 그게 우리 부부의 모습이다.
책방을 나오며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책 공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책과 사람을 좋아해서 비슷하게 닮은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발견한 것도 기뻤다. 예쁜 책방에 들러 책으로 채워질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여행을 시작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여행이 어디 있을까? 세상에서 제일 편한 여행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일보 칼럼>
[삶과 문화] 아내는 책, 남편은 공간 (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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