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135

어느 건축가의 여행법 여행은 걷는 일로 시작해 걷는 일로 끝난다. 길이 나오면 걷는다.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서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골목은 다른 골목으로 이어지거나 공원이 나오면서 다른 동네의 시작을 알린다. 걸으면서 보면 풍경은 고생보다는 보물이다. 도시에는 많은 요소들이 있어 산책을 즐겁게 해준다. 길을 잃을라치면 멀찍이서 방향타가 되어주는 특색 있는 건물,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즐겁게 해주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파는 상점가, 코를 자극하는 극한의 마력을 지닌 맛집들, 잠시 쉬어가라 유혹하는 나무 그늘과 커피잔이 놓인 파라솔, 한번 들어가면 빈손으로 나올 수 없는 쇼핑몰, 왠지 차분해지고 들뜨게 되는 서점, 언제나 만족도가 높은 미술관, 박물관들. 이런 장소들의 유혹 때문에 휴양지보다는 도시로의 여행이 더 .. 2021. 3. 19.
고양이와 강아지와 단풍나무의 집 땅의 주인은 누구일까? 건축주만의 것일까? 설계 의뢰를 받고 가보면 여러 가지 풍경들이 나를 맞는다. 주변에 집도 없고 빈 땅만 있는 경우라면 문제될 것도 없어 순탄하게 설계를 진행하면 된다. 그러나 그 땅에 멋진 나무나 바위가 있거나 주변에 집들이 모여 있다면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이 나무와 바위를 없애는 것이 옳을까? 신축이라고 하면 빈 땅에 집을 짓는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특히 울창한 나무들이 있다면 고민은 깊어진다. 충북 음성에 짓고 있는 이 집은 나무가 많았다. 지어질 집의 위치가 남쪽이 좋다고 판단해서 자그마한 나무 몇 그루를 옮겨심기로 했다. 그때가 겨울이어서 가지도 앙상하고 나무도 작아 보여 그렇게 결정했다. 건축주의 부모님이 그곳에 있는 단풍나무를 어여쁘게 여겼기.. 2021. 3. 19.
현재를 사는 동네 내 사무실은 오래된 주택 사이에 있는 똑같이 오래된 주택이다. 동네 이름은 동자동이다. 나도 주소지를 보고서야 동자동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후암동, 갈월동과 맞닿은 아주 작은 동이다.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고 있는 오래되고 낡은 집들은 비교적 임차료가 저렴하고 교통이 좋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산다. 이곳에 사무실을 얻은 것은 오래된 일식 가옥을 고쳐보겠다는 바람도 있었지만 가성비도 한몫했다. 어느 날 경사로에 자리 잡은 이웃 빌라 반지하의 출입문을 헤아리다가 이 좁은 곳에 다섯 가구나 살고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동네에는 끊임없이 방을 만들고 담을 늘려 확장한 희한한 집들도 많고 큰 집을 개조한 제조회사도 많다. 그들도 싼 임차료와 훌륭한 교통환경 때문에 이곳에 터를 잡았을 것이다. 동네를 산책하다.. 2021. 3. 19.
정원의 기록 사무실에 작은 흙마당이 있다. 작년 여름에 이 집이 아주 맘에 들었던 데는 이 흙마당의 역할이 컸다.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잡풀과 야생화들이 무성했지만 그것대로 생명력이 넘친달까? 다만 넝쿨째 자라는 부스스한 장미는 부담스럽기는 했다. 건물은 알아서 손을 보겠는데 정원은 대체 어떡해야 하는지. 정원 프로젝트,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숙제가 될 것 같았다. 집을 수리하고 사무실 정리를 하느라 여름과 가을을 보내 버린 뒤 겨울의 흙마당은 거무스름하게 마른 잡초만 남아 있었다. 봄이 되면 뭘 해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건 없고, 작은 화단이 볼 때마다 고민이었다. 그 사이 한 것이 있긴 하다. 잡풀들은 다 숨 죽고 갈색으로 변해 가는 넝쿨 장미의 부스스한 헤어를 깔끔하게 잘라 준 것이다.. 2021. 3. 19.
시대를 말해주는 집 서울의 어느 주택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이 든 여인이 혼자 살던 오래된 이층집이다. 잘 꾸며진 커다란 드레스룸과 파우더룸, 벽난로를 갖춘 넓은 마루, 꽃나무가 근사하게 어우러진 정원,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와 볕이 드는 선룸까지 갖추었으니 근사한 집이 틀림없다. 조명과 주방 찬장까지 섬세한 손길이 닿아 있다. 원래의 집이 마음이 들지 않아 유명한 건축가에게 맡겨 이쁘게 고쳐 지은 집이다. 둥그렇게 벽돌을 쌓아 만든 벽난로와 따뜻한 색조의 스테인드글라스는 그 건축가의 특성이다. 아침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할 때면 여러 가지 색이 바닥에 비췄겠다. 창문 아래 라디에이터 그릴도 고급스럽게 바꾸었다. 건축가와 어떻게 인연을 맺고 어떤 요청을 했는지는 온전히 비밀이다. 그러나 건축가가 고민한 것들이 무엇.. 2021. 3. 19.
보이지 않는 곳이 중요하다 집을 지을 때 첫 번째 만나는 난관은 공사 견적이다. 크게 복잡하지 않은 신축 주택의 공사 견적을 받았다가 깜짝 놀라곤 한다. 건축 재료도 오르고 인건비도 많이 상승했다지만, 해가 다르게 견적이 뛰어오른다. 집을 짓는 일은 점점 만만치 않은 일이 되어 간다. 설계에서 너무 복잡한 부분이 있었나 되돌아보기도 한다. 무조건 가장 저렴한 업체를 선택하는 건 물론 아니다. 비용도 알맞고 실력도 좋은 시공자를 찾는 것과 별개로, 집주인의 예산 범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안을 조정하며 견적을 맞춰 가는 작업도 동시에 한다. 먼저 가구류부터 도면에서 삭제한다. 살면서 하나하나 마련하는 것도 재미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분명 눈에 띄게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 다음으로 정원이나 외부의 마루 데크를 삭제한다.. 2021. 3. 19.
남자들의 놀이터 “저에겐 이 오디오가 정말 소중해요”라고 건축주는 말했다. 앰프와 스피커를 어디에 놓을지, 흡음판은 어떻게 배치할지, 좋은 계획을 세워 달라면서. 스피커와 앰프는 배선도 깔아야 하고 고가의 고출력 오디오는 별도 전기선이 필요해서 설계 단계부터 제대로 계획해야 한다. 좋은 소리를 위해 오디오가 놓일 공간과 위치도 미리 잡아놓아야 한다. 오디오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100% 남자 건축주다. 확실히 남자들이 오디오에 열광한다. 음악에 관심이 없더라도 오디오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성능 좋은 기계에 대한 관심이거나,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소리에 대한 관심일 수도 있다. 사실, 나도 좋은 소리를 들려주는 이 아름다운 기계들을 무척 좋아한다. 지난 주말, 서울국제오디오쇼에 가보았다. 주 관람객은 40대~6.. 2021. 3. 19.
건축가의 마지막 프로젝트 건축가가 주인공이라는 말에 혹해서 영화관에 갔다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을 했다. 히어로물이나 SF를 사랑하는 내가 작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감동하는 일은 극히 드문데 이 영화는 달랐다. 직업적 공감대도 있었지만 나이 드는 것이 참 멋진 일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되어서였다. 일본 아이치현 가스가이시 고조지 뉴타운의 귀퉁이에 목조 가옥을 짓고 살아가는 90세, 87세의 부부가 주인공이다. 건축가 슈이치씨는 1960년대 고조시 뉴타운 계획에 설계자로 참여했다. 그는 자연과 공생을 목표로 산을 중심으로 편안하게 연결된 설계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고도 성장기의 시대적 상황은 그의 계획대로 도시가 만들어지도록 놔두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콘셉트였던 산을 허물고 그곳에 더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 2021. 3. 19.
세 도시의 맛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맞이하는 것은 우리 부부의 오랜 습관이다. 일 년을 마무리하는 여행이라서 서너 달 전부터 어느 도시로 갈지 슬슬 찾기 시작한다. 나름의 법칙도 세워 두었다. 첫째, 인기 있는 여행지는 절대 가지 않는다. 둘째, 오래된 소도시를 찾는다. 셋째, 잘 먹고 푹 쉬기. 이번에 선택한 도시는 부여-공주-논산이다. 부여는 아버지의 고향이어서 본가 친척들이 산다. 할아버지가 계실 때만 해도 집안 행사를 치르러 자주 왔다. 기차가 다니지 않아서 복잡한 경로로 할아버지댁을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리조트와 아울렛 단지가 들어섰지만 도시는 빛바랜 시대에 멈춰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백제 유적지로 공주와 부여가 등재되면서 부여가 조금씩 변화했다. 부소산성과 궁남지, 정림사.. 2021. 3.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