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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젠트리피케이션 단상

by 봉볼 2021. 3. 17.

옛날 살던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다. 떠난 지가 20년이 넘었으니 당연하게도 동네는 몰라보게 변했다. 그런데, 시장이나 학교, 뒷산 등 동네를 특징짓던 장소들은 기억의 모습 그대로여서 반가움이 왈칵 몰려왔다.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은 그대로 있을까. 옛날 골목길로 접어들면서 가슴 한구석이 두근거렸다. 야구 캐치볼을 하던 골목길은 그대로일까. 창문으로 보이던 옆집은. 순간 ‘와’ 라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그 집은 거기 그대로 있었다. 우리가 살았던 그때 그 모습으로. 주변 다른 단독주택들은 모두 다세대 빌라로 바뀌었는데, 꿋꿋이 살아남은 집을 보니 뭉클했다.

혼 40주년을 맞은 배우 윤정희, 백건우 부부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 중차대한 결혼기념일에 부부는 처음 만났던 중국음식점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 거리에 여전한 그 식당에서 예전처럼 요리를 나눠 먹으며 완벽한 결혼기념일을 보냈다고. 부럽다. 우리 부부는 그 꿈이 이미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결혼기념일은 처음 만난 레스토랑에서 옛날 생각 하며 보내자고 했건만, 첫해 딱 한번만 이루어졌을 뿐이다. 훌륭한 건물로 건축잡지에도 소개되었던 그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몇 해 만에 고깃집으로 바뀌었고 지나칠 때마다 미용실, 치킨집으로 바뀌었다. 새 가게가 들어올 때마다 뜯고 바꾸면서 건물 모습도 완전히 달라졌다. 차선책으로 두 번째 데이트 때 갔던 인도음식점을 떠올렸으나 그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행히 세 번째 만났던 인사동의 작은 식당은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브라보! 네 번째 장소는 기억나지 않았는데 다행이다. 올해 14번째 결혼기념일은 거기서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내년에도 갈 수 있을까.

연남동 골목길에 자리 잡은 우리 부부의 작업실이 벌써 7년째다. 초기엔 동네산책을 자주했다. 골목길에서 마주쳤던 작은 집들과 곳곳에 숨어있던 이름 모를 작업실들은 따뜻한 기억이다. 지금은 달라졌다. 모퉁이를 돌면 보이던 작은 한옥은 철거되었고 작은 작업실이나 집은 음식점이나 카페로 바뀌었다. 우리는 더 이상 연남동 산책을 하지 않는다. 산책길에 보게 되는 건 오픈을 알리는 입간판과 어디서 본듯한 비슷비슷한 가게들과 하염없이 줄 서 있는 외지인들, 그리고 공사현장들뿐이다.

그 전에 근무하던 건축사무실이 ‘가로수길’에 있었기 때문에 한적하고 여유로운 동네가 어떤 식으로 변하고 망가졌는지 경험했다. 매일 아수라장이던 거리를 벗어나 연남동 주택가로 왔으나 이곳도 몇 해 사이 ‘뜨는 동네’ ‘핫한 동네’ 가 되었다. 이젠 여기도 초기 가로수길과 똑같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부동산이 많아지고 임대료가 오르고 가게가 생겼다가 없어지는 주기도 빨라진다. 이제 대기업 프랜차이즈만 들어오면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연남동은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즐길 사람들은 멋지고 재밌다고, 카페도 식당도 많다고 일부러 놀러 오겠지만, 나에게는 7년 전의 그 시절이 지금보다 훨씬 좋다.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하루에도 수많은 가게가 생기고 사라지는 서울에서 한가하게 추억 운운하는 것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현재의 집은 더 큰 집으로 가기 위한 중간단계이고, 더 비싼 동네로 옮기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상태로 살아가는 이 도시의 거주자들이 과연 자신의 동네나 작은 가게에 애정을 쏟을 수 있을까. 내가 사는 동네가 좋다는 것은 오랫동안 삶을 나눈 것들이 많아질 때 가능해진다. 이 도시는 추억이 담긴 음식점, 빵가게, 서점, 만화방 같은 마음을 둘 곳이 점점 사라진다. 사라질 것이니 맘을 두고 싶지도 않고 도시의 정서는 메말라간다.
우리도 언제 연남동을 떠나게 될지 모른다. 떠나는 날이 올 때까지 추억의 부스러기라도 이 동네에 남겨둬야겠다. 우리가 좋아하는 가게에서 기쁘게 빵을 사고, 커피를 마시며. 이 가게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가길 바라면서….

<한국일보 칼럼>

 

[삶과 문화] 젠트리피케이션 단상 (hankookilbo.com)

 

[삶과 문화] 젠트리피케이션 단상

옛날 살던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다. 떠난 지가 20년이 넘었으니 당연하게도 동네는 몰라보게 변했다. 그런데, 시장이나 학교, 뒷산 등 동네를 특징짓던 장소들은 기억의 모습 그대로여서 반가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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