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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나에게 맞는 높이

by 봉볼 2021. 3. 17.

결혼 전 신혼집을 구할 때 아내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는 아리랑 고개를 넘지 말 것. 두 번째는 싱크대가 높은 집을 구할 것. 아리랑고개란 돈암동에서 미아리로 넘어가는 곳에 있는 언덕을 말하는데, 당시 아내의 회사가 혜화동에 있었던 까닭에 회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싱크대는 아내의 큰 키 때문이었다. 낮은 싱크대가 너무나 불편하다는 것이다. 다행히 아리랑 고개 바로 아래에 있는 집을 구할 수 있었지만, 싱크대 약속은 결국 지키지 못했다. 높은 싱크대를 둔 작은 빌라를 찾는 건 사막에서 진주를 찾는 정도의 일이었으니까.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역시 싱크대는 불만을 넘어 지탄의 대상인데, 요즘엔 아내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이기도 해서 자못 심각해졌다. 아침 식사 설거지 담당이 되면서, 허리를 숙이거나 삐딱하게 서서 설거지를 하고 나면 허리 통증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남녀 평균을 훌쩍 넘는 큰 키의 아내와 나는 이토록 괴로운 한편, 아담한 보통 신장인 어머니, 아버지는 아무런 문제 없이 싱크대를 사용하고 계시니 과연 누구 키에 맞춰야 하나. 집을 짓거나 고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지만 정작 내가 사는 집의 싱크대 높이조차 결정하지 못하는 인생이다.

이런 일상적인 경험 때문에 집을 짓고자 하는 건축주들에게는 싱크대 높이를 잘 생각해 보라고 은근히 밀어붙이곤 한다. “업체 사장님 추천하는 거 믿지 말고 본인 몸을 생각하세요, 키와 습관에 맞는 높이를 찾아봅시다”라고. 싱크대에 대한 불만이 우리 부부만의 일은 아니었는지 근래 분양하는 한 아파트에서는 두 가지 높이의 싱크대를 선택할 수 있고 이것을 아파트 혁신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표준으로 지정된 싱크대 높이를 어쩔 수 없이 수용했다는 이야긴데, 우리 주부들의 인내심에 존경을 표하고 싶다.
실제로 집은 점점 평수가 커지고 고급스런 인테리어를 지향해왔다. 고급이란 취향의 문제긴 하지만 어쨌든 이전보다 재료와 디자인에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으니 그렇다고 해두자. 가전제품은 어마어마한 진화를 거듭했다. 수백만원에 달하는 냉장고가 나오고 전자동시스템이 장착된 주방가구도 등장했다. 그러나 실제 우리 몸의 가치는 잊혔던 것 같다. 키와 습관에 따라 높이와 너비를 세심하게 조율해야 하는 수치의 문제를 잊고 있었다. 주택시세는 높이려고 그토록 애쓰면서 주방 싱크대 높이는 일엔 관심조차 갖지 못했으니 말이다.

꼭 집을 짓지 않아도 자신의 치수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책상의 높이도, 세면대의 높이(이건 싱크대 다음으로 아내가 심각하게 공격하는 부분이다), 심지어 창문의 높이도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싱크대는 어느 정도 높이가 되어야 적당할까. 국가표준원 자료에서는 기본적으로 85㎝를 기본 높이로 정하고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조정하라고 한다. 인터넷에는 여러 경우가 제시되고 있는데 ①배꼽 높이 ②키의 1/2 + 5㎝ ③키×0.339)+29.3+2㎝ (슬리퍼 높이) ④팔꿈치에서 10㎝ 아래 ⑤키의 52% 등 다양한 기준법이 나와있다. 출처가 확실하지 않지만 참고 할만 수치다. 최근 리모델링한 빌라의 경우는 건축주의 큰 키를 고려해서 92㎝로 정했다.
싱크대 높이는 여성 표준 신장으로 정해진다고 하니, 아내는 “이제 주방일도 남녀가 같이하는데 남녀 모두의 표준키로 해야 하는 거 아니냐”란다. 그러나 평균은 함정이 있다. 신장의 차이가 10㎝ 이상 나는데 어떻게 중간치로 할 수 있겠는가. 둘 다 불편한 수치가 나올 수도 있다. 문제를 정확하게 해결해서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 나로서는 어정쩡한 평균은 좋은 결론이 아니라고 본다. 내 대답은 이렇다. 사랑하는 아내가 고생하지 않도록 그녀에게 맞추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나는 참을 수 있어’라고.

<한국일보 칼럼>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606301419042118?NClass=HJ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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