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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지키는 사람들

by 봉볼 2021. 3. 19.

사용 승인일 1982년 11월 15일. 연와조, 지하 1층, 지상 2층. 성수동에 있는 주택의 생일과 크기를 말해주는 정보다. 건축물대장에는 건물의 사용 승인(준공) 날짜가 나온다. 생일인 셈이다. 이 집은 38년 전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잘 살아왔지만 다음 주에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상업건물 신축을 위해 철거되기 때문이다. 서울이라는 도시 안에 뭔가를 짓게 되면 늘 맞닥뜨리는 상황이지만 항상 아쉬움과 시원함이 공존한다. 40년가량 이 땅에 앉아 있던 누군가를 밀어내는 것 같고, 잘 살고 있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만 새로운 건축을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숙제라서, 철거하고 나면 시원하기도 하다. 두 가지 마음의 공존. 적응할 만도 한데 익숙해지지 않는다.

소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철거’의 풍경에 익숙해지게 된다. 방치된 건물이 낡아가는 풍경도 종종 보지만 요즘은 아파트 단지 건설로 ‘마을 하나에 해당하는’ 영역이 철거되어 황량한 벌판만 남아 있는 풍경이 가히 충격적이다. 사라진 길과 건물, 나무, 동물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마른하늘에 날벼락 수준일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박물관이 하나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하는데, 마을이 없어지면 얼마나 많은 것을 잃는 것일까.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와 기억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낮은 상가들이 줄지어 골목을 형성했던 익산의 어느 길에 높은 펜스가 끝이 없이 세워진 것을 보았다. 아파트 개발을 위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집과 길들. 대구 연초제조창에서 보았고 대전 대흥동에서 보았던 익숙한 풍경이다. 아파트가 들어서면 이 길은 영구 음영지역이 될 거고 사람들의 이동을 가로막는 조경 담장이 세워질 것이다. 사람은 늘어나지만 길은 폐쇄적이며 빈부 격차는 물질로 확인이 가능한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이다. 부를 확인하고 차별의 근거가 그렇게 만들어진다. 철거의 최종 종착지는 늘 그러했다. 여기서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도 될까.

철거의 현장이지만 작은 희망은 존재한다. 어디에서나 하나의 생존자는 있기 마련. 겨우 살려낸 ‘익산 근대역사관’이 있다. 독립운동가이면서 의사였던 삼산 김병수가 1922년 개원했던 ‘삼산의원’이었던 이 건물은 ‘철거’를 피해 근처 부지로 옮겨져서 생존했다. 지상 2층의 거대한 석조건물은 벽체를 자르고 지붕 트러스를 해체하여 크레인으로 옮기고 트럭으로 이동한 뒤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거쳤다. (근대역사관을 방문하면 복원과정을 사진으로 볼 수 있다) 근대건물 최초로 ‘절단’한 후 이축 복원한 경우라고 한다. 완벽하게 원형 그대로는 아니지만 지키고자 하는 노력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무언가를 지키려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은 즐겁다. 철거된 마을의 씁쓸함, 삼산의원의 작은 위로는 춘포역 근처 ‘대장정미소’에서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대지주였던 호소카와 가문의 농장에서 생산된 미곡 가공을 위해 세워진 도정공장이다.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던 이곳을 인수했다는 중년의 신사분을 만났다. 우리 부부가 근대건축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게 된 그는 신이 나서 공장 구석구석을 안내해 주었다.

낡고 오래된 건물을 놀이터처럼 좋아하는 우리처럼 그도 ‘같은 마음’임을 알아챘다. ‘이 벽이 참 예뻐요’ ‘바닥이 더 멋져요!’ 하나라도 더 설명해주고 싶은 그의 설명은 끝이 나지 않았다. 쓰레기더미 속에서 찾아낸 옛 물건들을 보물처럼 분류해 놓고 하나하나 모두 보여주려고 부지런히 움직이던 걸음, 옛 재료에서 발견한 글씨와 흔적들을 설명하는 눈빛, 진지하고 즐거운 표정. 그런 것들을 보고 있으니 앞서 봤던 철거의 아픔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의 얼굴은 그 자체로 힐링이었다.

정구원 건축가

[삶과 문화] 지키는 사람들 (hankookilbo.com)

 

[삶과 문화] 지키는 사람들

철거의 현장이지만 작은 희망은 존재한다. 어디에서나 하나의 생존자는 있기 마련. 겨우 살려낸 ‘익산 근대역사관’이 있다. 독립운동가이면서 의사였던 삼산 김병수가 1922년 개원했던 ‘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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