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겐 이 오디오가 정말 소중해요”라고 건축주는 말했다. 앰프와 스피커를 어디에 놓을지, 흡음판은 어떻게 배치할지, 좋은 계획을 세워 달라면서. 스피커와 앰프는 배선도 깔아야 하고 고가의 고출력 오디오는 별도 전기선이 필요해서 설계 단계부터 제대로 계획해야 한다. 좋은 소리를 위해 오디오가 놓일 공간과 위치도 미리 잡아놓아야 한다. 오디오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100% 남자 건축주다. 확실히 남자들이 오디오에 열광한다. 음악에 관심이 없더라도 오디오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성능 좋은 기계에 대한 관심이거나,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소리에 대한 관심일 수도 있다. 사실, 나도 좋은 소리를 들려주는 이 아름다운 기계들을 무척 좋아한다.
지난 주말, 서울국제오디오쇼에 가보았다. 주 관람객은 40대~60대 남성들이었다. 수많은 오디오 제품들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관계자들에게 열심히 질문도 했다. 대담하게도 가격을 물어보기도 하고, “클래식 좀 들려줘요”, 라며 다른 곳에선 상상할 수 없는 요구도 했다. 여성들도 있지만 남편을 위해 동행한 듯 보였다. 다양한 브랜드의 오디오룸에서는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온 힘을 다해 오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언뜻 보면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만 내 생각에는 ‘소리’를 감지하려고 온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빈티지 궤짝형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자, 옆에서 청음하던 사람이 낮게 탄성을 지른다. 나도 함께 탄성을 지를 뻔했다. 이곳은 기계를 좋아하는 남자들의 놀이터였다. 어릴 때부터 갖고 싶었던 오디오들이 떠올랐다. 그냥 앉아만 있어도 흥분이 밀려왔다.
남자들의 또 다른 놀이터라면 자동차 공간이 아닐까? 요즘은 주택을 설계할 때 주차장 공간에 점점 더 많은 신경을 쓴다. 최근 진행하는 주택의 건축주는 포르셰를 좋아한다. 주차장에 포르셰 이미지를 넣은 건축 계획안을 3D 모델링해서 보여주었더니, “아직 포르셰 주인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사야겠어요”라며 그는 활짝 웃었다. 그 꿈이 이루어질 때를 대비해 작업실에서 주차장을 통해 멋진 차를 볼 수 있도록 자동차 높이에 작은 창을 만들었다. 인터넷에 소개된 어떤 주택은 거실에서 자신의 차를 볼 수 있도록 통유리로 주차장 벽을 만들었다. 주차장이 개인 애장품을 보여주는 쇼룸처럼 디자인된 것이다. 주차장은 더 이상 뒤로 밀려난 어두운 공간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이 놓인 가장 즐거운 장소가 된다.
주차장은 차를 정비하는 기계의 공간이기도 하다. 전기차 소유자라면 충전 설비도 갖춰야 한다. 미국 영화에는 차고가 남자들의 아지트처럼 등장한다. 각종 공구를 걸어놓은 차고에서 차를 정비하거나 필요한 물건들을 뚝딱 만들어낸다. 때론 혼자만의 시간을 갖거나 친구를 만나는 장소로도 사용됐다. 스티브 잡스도 차고에서 애플을 창립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파트 거주자에게 자신만의 차고는 가능하지 않다. 정비는 상상도 못할 테고 내 방식대로 세차하기도 어렵다. 그런 마음을 알아준 것인지 최근에는 세차장을 자신만의 아지트처럼 제공하는 셀프주차장이 등장했다. 전용 차고처럼 자신의 자동차만 쏙 들어가는 공간에서 심야든 오전이든 시간 구애 없이 평소 즐겨듣던 음악을 마음껏 크게 들으며 취향에 맞는 세제들을 활용해 세차를 하는 것이다.
세차에 대한 관심은커녕 의지조차 없던 나도 시장 조사차 들렀다가 세차 재미에 푹 빠졌다. 오디오쇼와 마찬가지로 세차장도 남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왜 남자들은 가장 좋은 세차장을 가기 위해 먼 거리도 감수하고 달려와 몇 시간 동안 온갖 정성을 들여 세차를 하는가? 의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지만 나는 공감할 수 있었다. 남자들도 자신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 남자의 장소는 앞으로 늘어날 것이다.
정구원 건축가
<한국일보 칼럼> 2019.03.15
[삶과 문화] 남자들의 놀이터 (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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