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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집과 가전제품

by 봉볼 2021. 3. 19.

“고작 며칠 입던 옷을 2주 이상 입겠더라구요. 전자 의류관리기 설치할거니까 자리 좀 만들어 주세요.” 10년 전 설계한 주택의 내부 리모델링을 위해 디자인 회의 도중 드레스룸 계획을 협의하는데 건축주가 이런 요구를 했다. 광고에서 본 그 제품을 건축주 가족은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10년 동안 건축 자재와 기술은 크게 변했다. 창호의 성능은 더 좋아졌고, 조명 디자인이나 내부 마감재도 선택의 폭이 다양해졌다. 건축주의 취향도 바뀌었다. 무엇보다 집에 들어가는 전자제품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우선 교체 대상은 TV다. 그땐 32인치도 컸는데, 이제는 60~70인치를 고른다. 세탁기만 있던 다용도실에는 같은 크기의 건조기가 얹혀졌다. 드레스룸에도 전기 콘센트가 많이 필요하다. 드레스룸에 세탁기, 건조기, 의류관리기를 한꺼번에 설치하기도 한다. 세탁기가 드레스룸에 들어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커다랗던 진공청소기는 무선충전이 되는 작고 성능 좋은 청소기로 바뀌었다. 인터폰에는 컬러 모니터가 달려 있다. 변기 위에 얹어 쓰던 비데는 변기 일체형 모델이 많이 등장했다. 사람이 가까이 가면 변기 뚜껑이 알아서 열린다. 이러다가 변기와 대화를 할지도 모르겠다.

내 첫 번째 가전제품은 어린 시절 마루에 있던 라디오였다. 라디오에 머물렀던 마음은 곧 TV로 옮겨갔다. 가림막을 양쪽으로 열면 흑백 모니터가 나왔던 큰 상자형 흑백TV였다. TV는 집집마다 정서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가전제품일 것이다. 우리집 TV는 안방에 놓였다. 이웃집에 TV 보러 가지 않아도 되는 건 좋았지만 저녁 9시가 되면 안방에서 물러나야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TV가 있던 안방은 꿈과 모험의 세계로 이끌던 마법의 방이었다.

안방을 나온 뒤에는 라디오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 다음으로 내게 영향을 미친 가전제품은 전축이다. 다행히 이 물건은 누나 방에 놓여서 출입제한에서 풀렸다. 전축이 있는 방은 자유와 즐거움이 있는 방으로 변했다. 전축은 창 아래 놓였고 누나들과 함께 음악에 빠졌다. 처음으로 오디오 룸을 갖고 싶었다. 막연하나마 내게 그런 공간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냉장고는 ‘샤베트를 만들 수 있는 기계’였다. 그 맛있는 아이스바를 수시로 만들어 꺼내 먹을 수 있다니, 마법이 따로 없었다. 냉장고가 들어오던 날은 너무 흥분돼 그 기억이 또렷하다. 빨리 얼음이 얼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던가! 냉장고가 들어온 날부터 나는 주방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기쁨의 공간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그러다 낮고 펑퍼짐한 김치냉장고가 들어왔는데, 부엌 공간이 부족해 마루 구석에 덩그러니 놓였다. 주방은 점점 좁아졌다. 냉장고는 한 개로 부족해 하나 더 들어왔고, 식기세척기, 전자레인지 등 수많은 가전제품의 집합소가 됐다.

최근 들어 가장 강력한 전자제품은 컴퓨터다. 컴퓨터는 집안 가전제품의 질서를 바꿨다. 더이상 오디오를 들으러 누나 방에 가지 않아도 되고 TV를 보려고 거실이나 안방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 어느 방이나 책상 위에는 컴퓨터가 놓인다. 이제 세상의 중심은 내 방이다.

최근 설계하는 주택들의 평면도를 보면 전자제품이 더 많이 표시된다. 세분화되는 기능을 만족시키는 다양한 전자제품들이 우리네 집에 더 많이 들어오고 있다. 냉장고와 TV는 더 커지고 다양한 기능을 갖게 됐고, 서로 연결되어 과거에 없던 새로운 기능을 발현한다. 전자제품은 방의 크기와 구조를 바꾼다. 즉, 집을 바꾼다. 문득, 궁금해진다. 이 집을 10년 후에 다시 리모델링하게 된다면 전자제품들이 어떻게 바뀔까? 짐작하기 어려운 물건이 상상도 못할 곳에 자리를 잡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구원 건축가

<한국일보 칼럼> 2018.12.21

[삶과 문화] 집과 가전제품 (hankookilbo.com)

 

[삶과 문화] 집과 가전제품

“고작 며칠 입던 옷을 2주 이상 입겠더라구요. 전자 의류관리기 설치할거니까 자리 좀 만들어 주세요.” 10년 전 설계한 주택의 내부 리모델링을 위해 디자인 회의 도중 드레스룸 계획을 협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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