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지막 날을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맞이하는 것은 우리 부부의 오랜 습관이다. 일 년을 마무리하는 여행이라서 서너 달 전부터 어느 도시로 갈지 슬슬 찾기 시작한다. 나름의 법칙도 세워 두었다. 첫째, 인기 있는 여행지는 절대 가지 않는다. 둘째, 오래된 소도시를 찾는다. 셋째, 잘 먹고 푹 쉬기.
이번에 선택한 도시는 부여-공주-논산이다. 부여는 아버지의 고향이어서 본가 친척들이 산다. 할아버지가 계실 때만 해도 집안 행사를 치르러 자주 왔다. 기차가 다니지 않아서 복잡한 경로로 할아버지댁을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리조트와 아울렛 단지가 들어섰지만 도시는 빛바랜 시대에 멈춰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백제 유적지로 공주와 부여가 등재되면서 부여가 조금씩 변화했다. 부소산성과 궁남지, 정림사지 등 문화 유산들이 정비되고 카페며 즐길 거리가 많아졌다. 역사도시가 된 부여가 낯설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재밌는 소식도 들었다. 백마강 주변 한적한 동네를 솜씨 좋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새롭게 바꾸는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자온길 프로젝트’라고 명명된 골목은 할아버지가 사셨던 그 동네에 있었다.
여행을 떠난 날, 몹시 추웠지만 부드러운 햇살이 환하게 쏟아졌다. 소도시를 갈 때마다 서울과는 다른 햇볕에 반하고 만다. 낮고 작은 건물들이 아담한 길을 따라 놓인 마을에 햇살이 골고루 내리쬔다. 높은 건물이 없다는 것은 공평하게 온화한 햇볕을 받는 일이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아담한 길에 열여섯 채의 건물이 단장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점, 레스토랑, 카페, 공방 등등 이미 완성된 것도 있고 아직 문을 닫고 보수 중인 것도 있었다. 새로운 시도가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옛날에 할머니를 따라 오일장에 갔던 기억을 떠올리며 조용히 둘러보았다. 주변에 아파트도 들어서고 있지만, 소박하고 작은 건물들도 자기만의 방식대로 살아갈 방도를 찾고 있었다.
길도 길이지만 여행은 맛이 아닐까? 향토적인 음식도 좋지만, 가끔은 새롭고 특별한 맛을 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는데 이를 적중시킨 곳이 있었다. 자온길의 작은 카페에서 먹었던 수플레 팬케이크였다. 서울의 어느 식당 못지않게 맛있는 아침 식사를 먹을 수 있었고 오래된 집을 조심스레 고친 것도 기분이 좋았다. 로컬의 맛이라고 해서 연잎밥과 떡갈비만 먹을 수는 없지 않나? 나에게 부여는 수플레 팬케이크로 기억되는 도시가 되었다.
부여-공주-논산, 세 도시 여행은 기억되는 음식이 모두 달라서 인상이 뚜렷했다. 어떤 도시를 가든 원도심을 둘러보고 걸어서 건물과 골목 구경을 하는 우리 부부에게 공주는 좋은 경험을 주었다. 선교사 주택과 성당을 돌아보고 천변을 걸으면 좁은 골목길을 만나게 되는데 골목길 끝에 한옥을 고친 자그마한 찻집이 있었다. 남자들끼리 와서 찻주전자에 담긴 차를 능숙하게 마시는 걸 보고서 공주는 대단한 곳이라고 느꼈다. 공주의 맛은 밤이 가득 든 식빵에 있었다.
군대 다녀온 사람들에게 익숙한 연무대 근처에 작은 식당이 있다길래 일부러 들렀다. 로컬 푸드를 표방하는 식당인데, 농장의 식재료로 건강하게 만든 피자와 파스타, 커피와 차를 준비한다. 창고 건물을 개조한 거친 공간을 아기자기하게 꾸몄다. 담백하고 맛있는 파스타를 먹으며, 이제 논산은 파스타의 도시로 기억되겠구나 생각했다.
향토음식이 아니어도, 줄을 서야 먹을 수 있는 유명한 맛집이 아니어도 된다. 커피를 마시러 강릉에 가듯이 파스타를 먹으러 논산을 가고 밤식빵을 먹으러 공주에 가고 수플레 팬케이크를 맛보러 부여를 가면 좋겠다. 자기 색깔대로 지역에 동화되어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하는 곳들. 그곳이 여행의 목적이 될 수도 있다. 그 맛으로 도시는 새롭게 기억된다.
정구원 건축가
<한국일보 칼럼> 2019.01.11
[삶과 문화] 세 도시의 맛 (hankookilbo.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