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피를 하루에 세 잔 이상 마신다. 단 음료는 한 잔 이상 마시기 어렵지만 커피는 연거푸 여러 잔도 가능하다. 커피는 노동의 음료라고 했던가? 일할 때 커피만큼 알맞은 음료도 없는 것 같다. 집중해서 일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할 때, 회의할 때, 어딘가 손님으로 찾아가서 기다릴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물음. “어떤 커피 하실래요?”
길거리에 두세 집 걸러 한 집은 커피숍일 정도로 커피가 장악한 시대를 살고 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도 커피숍이 있었지만 여학생과 미팅할 때나 갔고, 그조차도 지금의 카페와는 분위기가 영 달랐다. 그때 학생들에게 커피의 공간이라면 학생회관이나 도서관의 커피 자판기 근처였으리라. 커피 자판기는 끽다와 흡연의 장소이자 휴식과 담소와 회합의 장소였다. 다 마신 종이컵을 눌러 컵 차기를 하는 유희의 공간이기도 했고...
지난 몇 년간 길목을 장악한 커피숍을 살펴보니 빠른 속도로 흥했다 망하는 꼴이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다. 집 근처 전철역 주변은 가장 잘나가는 프랜차이즈 커피숍과 패스트푸드 매장이 차지하고 있는데, 성공신화라 불리며 공격적으로 매장을 넓히던 B 커피점이 얼마 전 문을 닫았다. 남은 커피숍은 고객 충성도가 높거나 가격 경쟁력으로 승부하는 곳인데, 이조차도 과연 오랫동안 영업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곧 새로운 프랜차이즈로 바뀌고 말 것이다.
커피숍을 만나고 커피를 마시는 장소로만 이용할까? 요즘 커피숍은 ‘일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나도 지금 어느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커피숍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바로 옆에도 노트북, 반대편에도 노트북... 손님의 절반 이상이 혼자 일하는 사람들이다. 담소를 나누는 목소리는 거의 없고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린다. 커피숍에서 컴퓨터를 켜고 열심히 일에 집중하는 모습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다. 나 역시 이따금 문제가 잘 풀리지 않을 때 노트북을 들고 커피숍으로 간다. 사무실보다 넓고 쾌적한 곳에서 커피 한 잔을 놓고 머리를 굴리다 보면 마법처럼 해답이 보일 때가 있다. 혼자 일하다 보니 작업자들이 모여 있는 커피숍은 동류의식을 느끼는 귀한 장소가 된다. 열심히 몰두하는 주변 사람들 모습에 자극을 받기도 하면서.
책을 구입하는 서점의 풍경도 점점 바뀌고 있다. 최근 합정역에 새로 문을 연 한 대형서점에도 당연히 커피숍이 들어왔다. 그것도 공간의 중심에 떡 하니 자리잡고 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커피숍은 어떤 공간에도 어울리지만, 책과 커피 향은 더욱 절묘하게 어울린다. 커피숍과 서점이 근사하게 만난 장소라면 일본 도쿄의 ‘쓰타야 서점’이 있다. 매장 디자인과 컨셉트도 무척 훌륭하지만, 서점의 가장 중요한 장소에 스타 벅스 커피점이 있어 서점에 들어서는 순간 커피향에 평온한 기분이 된다. 커피향과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의 느슨한 풍경이 서점 안에서 펼쳐지니 오랜 시간을 서점에서 보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멋진 책과 소품들도 많지만, 이곳에 커피를 내리는 사람과 커피향이 빠져 있다면 지금처럼 자주 찾는 장소가 될 수는 없었으리라.
커피는 건조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공간까지도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재주가 있다. 요즘 젊은층에서 핫플레이스로 통하는 공간들은 ‘공장’이나 ‘창고’같은 거친 공간이 커피와 절묘하게 만나 재탄생한 곳들이 많다. 기계와 소음으로 가득 차있었을 거대한 공간이 커피머신과 바리스타, 커피향으로 채워졌다. 공장과 이토록 잘 어울리는 재료가 커피 말고 뭐가 있을까 싶다. 그러니, 커피를 노동의 음료가 아닌, ‘마법의 음료’ 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건조하고 맥 빠진 공간에 여유와 향기를 주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커피가 있는 풍경’을 만드는 것이다.
<한국일보 칼럼>
[삶과 문화] 커피와 공간 (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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