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즐기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유명한 관광지보다는 무작정 길을 걷거나 가능하면 보통 사람들이 거주하는 주택가 골목길을 거닐곤 한다. 오래되고 범상치 않아 보이는 집이 눈에 띄면 이리저리 둘러보고 들어가 본다. 우연히 보물을 발견하는 즐거움이야말로 여행의 본질이다.
얼마 전 도쿄를 방문했을 때도 숙소 근처의 골목길을 무작정 걸었다. 산책하려면 큰 도로를 따라가는 것보다는 한 블록 뒤쪽의 작은 도로가 더 흥미로운 법이다. 옹기종기 모인 집들의 안락한 느낌에 몸을 맡기고 걸어가는데, 멀리서 길게 둘러진 담장이 눈에 들어왔다. 담장 너머로는 잘 자란 향나무들이 빼곡하게 보였다. 공원이 아니면 사찰인가 싶었다. 나이가 지긋하고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따라 담 안쪽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니 호기심이 발동했다. 뒤를 따라 걸었다. 숲이 우거진 진입로를 얼마간 걷다 보니 서양식 저택이 등장했다. 지붕 끝만 슬쩍 보였는데도 예사롭지 않은 건물임을 직감했다. 유레카! 어설프게 서양식을 따라 한 건물이 아니라 제대로 양식을 살린 집이었다. 직업병이 도지듯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시선은 이곳 저곳 두리번거린다. 집 앞에 ‘이와사키 저택’이라는 이름이 적혀있다. 문화재 저택이었다.
내부에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한다며 신발을 담는 봉투까지 준다. 바깥과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방과 홀, 성큰(sunken) 가든, 테라스... 목재로 치장한 내부는 화려했고 벽지, 라디에이터, 기둥은 디테일 하나하나 그 완성도가 놀라웠다. 집이 지어진 것은 1896년. 120년이나 된 집이 이런 디테일을 갖고 있다니! 영국의 벽지 회사에 직접 의뢰하여 만들어진 금박 벽지도 인상적이었다. 얼마나 귀한 작업이었으면 만드는 과정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그 시대에 일본에 이런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니, 과연 누가 지었을까?
서양식 건물 옆에 일본 전통식 저택이 연결되어 있다. 지금은 다실로 쓴다. 원래 이 저택은 집도 여러 채가 더 있었고 지금도 시민공원을 방불케 하는 정원이지만 당시엔 훨씬 더 넓었다고 하나, 도쿄대가 확장되면서 부지가 축소되었다. 그렇다면 처음 지어졌을 당시의 화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이 집의 주인인 이와사키는 도대체 누구길래, 고종이 지은 서양식 궁궐 건축물보다 더 화려한 집에 살았던 것일까.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건물을 다 보고 나오는 출구에서 해소되었다. 가문의 문장에 대한 해석과 연혁을 설명해 놓은 곳에서 ‘미쓰비시’ 라는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이곳은 미쓰비시 창업자의 장남이자 3대 회장이었던 ‘이와사키 히사야’ 의 저택으로 영국건축가 ‘조사이어 콘더’에 의해 설계된 건물이었다. 콘더는 훗날 도쿄대에 통합되는 고부(工部)대 조가학과(건축과의 전신) 교수로 지내면서 많은 일본인 제자를 길러내어 일본 건축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미쓰비시라고 하니 입맛이 씁쓸하다. 미쓰비시는 이후 일본제국주의의 확장에 큰 공헌을 하는 대표적인 ‘전범기업’이며, 우리에게는 강제징용이나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가 등장할 때마다 거론되는 기업이 아닌가.
이 집을 보고 있으면 당시 조선업과 광업으로 많은 부를 축적한 이 가문의 절정기가 느껴진다. 건물이 아름다운 만큼 그 곳에 살았던 사람도 흠결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건축적인 아름다움과 감동은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 점점 복잡해진다. 화려함이 깊어질수록 그림자도 깊다. 건물에 죄를 물을 수는 없지만 건물에 쌓여있는 이야기들은 거대한 질문이 되어 나를 누른다. 역시 건축은 단순한 콘크리트나 돌덩이가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가 쌓여가는 유기체일까. 이런 건물에서 건축가는 어떤 책임을 느껴야 할까.오랜만에 느껴본 건축적 감동은 생각지도 않은 배신을 당해버렸다.
<한국일보 칼럼>
[삶과 문화] 감동의 배신 (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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