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기온이 36도라고 일기예보에 나오길래 안 되겠다 싶어 하루짜리 피서를 떠났다. 설악산 너머 동해바다나 보고 오자며 아침 일찍 나섰다. 확실히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강릉을 향해 달리다가 속초로 방향을 바꾼 것은 서점 때문이었다. 탐독가는 아니지만 ‘서점’이라는 공간을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서점에 가면 기분이 좋았는데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나만은 아닌지, 요즘 쇼핑몰이나 호텔 등에 서점 형식의 인테리어가 적용된 곳이 많다.
그래서, 도착해서 아침을 먹자마자 달려간 곳이 동아서점이었다. 속초에서 3대째 운영하고 있다길래 오래된 가게인 줄 알았는데 깔끔하게 리모델링되어 있었다. 일단 첫인상은 쾌적하다는 것. 층고가 높아 공간이 탁 트인 느낌이 들었고 구획별로 잘 비치된 책들이 무척 다채로웠다. 게다가 조명도 책 읽기에 딱 좋았다. 계산대에 서 계시던 연세 지긋하신 주인분이 서점의 분위기를 딱 잡아주고 있었다. 오전부터 서점을 찾은 손님들을 바라보는 눈빛에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담겨 있었다. 설렘이랄까? 대형서점의 점원이나 알바생은 친절하지만 사무적이었다면 이 공간과 사람들의 분위기는 내 집에 온 손님을 대하는 것 같은 따뜻함, 편안함이었다.
첫인상의 느낌은 책 진열대를 보면서 더 확실해졌다. 책이 손님들의 눈에 잘 들어오게 놓여있었는데, 그 책 옆에는 ‘이 책을 읽으면 이것도 궁금할 거야’라는 표정으로 연관된 책들이 놓여 있었다. 서점을 좋아하지만 막상 서점에 가면 책에 집중하지 못하는 나조차도 이곳 저곳에 놓인 책을 펼쳐 들고 말았다. 작은 동네 서점들은 주인장의 취향이 강하게 드러나 특색은 있지만 강요하는 느낌도 있어서 때론 편치 않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곳의 책들은 사람들에게 ‘이런 게 궁금하시죠?’ ‘이런 것을 읽어보면 삶이 풍요로워질 거예요’ 같은 상냥한 목소리가 느껴졌다. 적당히 큰 규모의 서점이기에 다채로운 서가가 구성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3대였기에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공간이건 문화유산이건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그렇지만 스토리텔링이 무엇이며 무엇을 스토리텔링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대답이 쉽지가 않다. 아파트를 짓는데 스토리를 넣겠다며 과거의 지명이나, 전설 등을 가져오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막상 지어지면 거대한 건물과 조경이 있을 뿐이다. 스토리는 면면히 흘러온 삶의 모습,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집과 골목, 나무와 숲에서 비롯되는데 그것들을 몽땅 밀어버리고 100년 전 지명을 끌어온들 무슨 연결성이 있을까? 문화유산의 경우는 생활과 동떨어진 역사들을 억지로 가져오는 경우도 많다. 나와 나의 가족, 내 이웃, 내 친구들이 경험하며 오랫동안 지켜보고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진짜 스토리텔링이 아닐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도시, 그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과 ‘기억’이다. 동아서점의 주인은 존재 자체로 스토리텔링의 중심에 있었다. 오래된 양조장을 개조해서 수제 맥주를 제조하고 또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버드나무 브루어리’와 일본식 가옥을 정취를 살려 개조한 ‘오월 카페’, 제재소 건물의 간판을 그대로 둔 채 적절히 공간의 쓰임을 만든 ‘비단우유차’,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일을 오래 해오던 부모님의 공장과 창고를 카페로 개조한 ‘칠성 조선소’ 등등, 속초와 강릉에서 만난 장소들은 지역의 크고 작은 역사를 간직한 공간들이었다. 쓰임을 다하고 다른 공간으로 바뀌었지만, 사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에 그 이야기가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스토리는 이미 도시 안에 존재한다. 다만 그것을 발견하려면 작은 흔적들의 소중함을 알아야 하고 작은 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한국일보 칼럼>
[삶과 문화] 스토리가 있는 장소 (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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