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킹화를 살까 등산화를 그냥 신고 갈까? 아니면 운동화를 계속 사용할까? 제주여행 출발 전, 고민은 신발이었다. 이번 여행 컨셉이 걷기라 걷기 편한 신발을 신고 싶었다. 이전부터 갖고 있던 등산화나 운동화도 나쁘지 않았지만 사람 마음이 요상한건지 마치 걷기전용 신발을 신으면 더 잘 재미있게 걸을 것 같았다. 며칠 고민 끝에 나는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 뭐라도 조금 더 낫겠지라는 얄팍한 명분에 어느새 카드를 긁고 있었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신발 밑창부터 안쪽까지 샅샅이 꼼꼼히 살폈다. 음, 역시 잘 만들어졌네. 잘 걸을 수 있겠어라는 자기 확신을 가질 정도의 만듦새는 되었다. 등산화보다는 가볍고 운동화보다는 튼튼해 보였다. 역시 나는 긍정의 달인인가 보다. 이 긍정의 연장선에서 아내에게도 트래킹화를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긍정의 결과가 늘 좋은 것은 아니다. 야심차게 구입한 트래킹화는 다음날 보니 아내에게 잘 맞지 않았고 고민 끝에 아내는 내가 그렇게 마음에서 지우려 했던 ‘등산화’를 신고 여행을 시작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둘 다 별 차이는 없다, 였지만 피부가 훨씬 연약하거나 ‘군대면제’인 아내는 발바닥에 몇 개의 물집이 잡히고 말았다. 결코 트래킹화가 좋아서는 아닐 것이다.
이번 여행은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진 ‘올레길’을 걷는 거였다. 21번까지의 올레길 코스 중 어느 곳을 걸은 지는 파트너인 ‘아내’에게 일임했다. 그녀가 선택한 코스는 13ㆍ14코스였다. 나야 계획대로 걸을 테니 그게 어디인지 보지도 않았다. 마치 영화를 예고편 시청이나 사전지식이 전혀 없이 봤을 때 더 재미있는 것처럼 새로운 길을 그냥 걸으면 된다 싶었다.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 동안 제주에 오면 당연히 렌트카를 빌렸고 몇몇 유명 장소를 찾아 다니고 맛집투어를 했다. 그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제주의 반의반 쪽도 못 봤다는 걸 이번 투어를 통해 알게 됐다. 괜히 사람들이 걷는 게 아니었다.
‘걸으면 보인다‘는 여행에서 늘 강조하는 말이다. 외국에 나가면 항상 걷는다. 괜히 동네 골목길로 빠져서 일상의 공간을 걷다 보면 창문, 대문, 부적, 나무, 담장 등등 새로운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어 즐겁다. 그렇게 외국에서는 했는데, 왜 제주에서는 걸을 생각을 안했는지···. 조금 늦은 후회다.
이번 걷기에서 제주 담장의 아름다움, 감귤농장의 평소 모습, 다양한 야생화들, 나무들, 숲길, 바닥에 깔린 여러 가지 돌들 등을 발견했다. 아, 그리고 어느 길에서 나던 오렌지향은 정말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은 것은 화산석으로 만든 담 사이에 있던 대문들이다. 숙소 근처 농장이나 집들 대부분의 문들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디자인이 놀라웠다. 정말 평범한 원형 파이프와 각 파이프로 만들었는데(건축현장에서는 정말 흔하디 흔한) 구조적으로도 완벽하고 기능과 미 둘 다 살렸다. 게다가 옆집과 차이를 두기 위해 조금씩 변형이 이루어져 있다. 정말 디자인을 잘 아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디자인을 맡겨서 만든 것일까?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어느 솜씨 좋은 철공의 작품이 아니었을까? 오랜 시간 여러 시도를 해보며 조금씩 개선되다 보니 이런 문이 만들어진 건 아닐까 상상해 본다. 그 문을 보며 서울의 오래된 집들에서 발견하는 멋진 디자인들이 떠올랐다. 과거 인력이 풍부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콘크리트 담과 대문은 지금 봐도 감탄사가 나온다. 디자인을 배운 사람이 꼭 디자인을 잘 할 리 없다. 정말 만드는 것을, 디자인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결과물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어쨌든 이번 걷기여행에서 걷진 귀중한 디자인이다.
<한국일보 칼럼>
[삶과 문화] 장인의 발견 (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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